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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Jan 09. 2020

1980년 5월 24일, 송암동 학살사건

인류의 양심에 대한 도전

 1980년 5월 24일, 특전사 11공수여단은 기존 주둔지인 주남마을에서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곧 진군을 시작했다. 잠시 후 이동 중이던 11공수여단 선두는 광주 남구 효덕동을 지나던 중 시위대를 발견하고 이들을 향해 발포했다. 선두 병력을 뒤에서 따라가고 있던 11공수여단 본대는 총소리를 듣고 주변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평범한 시민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을 뒷산에서 놀고 있던 효덕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와 친구들은 총소리를 듣고 놀라 달아났다. 전재수는 그 과정에서 고무신이 벗겨져 뒤를 돌아봤다. 그는 그 순간 계엄군이 발포한 M-16 총탄에 가슴을 맞고 사망했다. 진월동 원제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있던 전남중학교 1학년 방광범도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효덕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초등학교 5학년 학생도 총상을 입었다. 군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자 민간인 학살이었다. 


 초등학생 전재수는 1969년 생으로, 생존했다면 2021년 기준 한국 나이 53세로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개인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5월 광주에는 전재수보다 어린 희생자들도 있었다. 최연소 희생자는 가족들과 함께 실종된 후 사망자로 인정받은 2살 어린이이다. 5월 27일에 총상을 입은 채 시신으로 발견된 4살 아이는 끝내 가족을 찾지 못한 채, 5·18 묘역에 묻혀 있다.


 상황을 정리한 11공수여단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불과 몇 시간 후, 광주 남구 송암동 인근을 이동하던 중 기습공격을 받았다. 갑자기 크레모아가 터졌고, 수류탄이 날아왔다. 11공수여단은 즉시 기습 주체를 향해 응사했다. 전투는 30분간 이어졌다. 11공수여단은 발포 원점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확인 결과, 11공수여단을 공격한 건 같은 계엄군인 전투교육사령부 산하 교도대 소속 군인들이었다. 즉 계엄군 간 오인 교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의 전투로 10명의 사망자 (11공수여단 9명, 교도대 1명)와 3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김평용 (살레시오고 2학년)과 박연옥은 거리를 지나던 중, 이들의 교전에 휘말려 사망했다. 김평용은 도망치던 중에 M-16 총탄에 맞았다. 박연옥은 총성을 듣고 하수구에 숨었다. 군인 한 명이 그에게 나오라고 지시했지만, 너무 무서워 나오지 못했다. 잠시 후 그 군인이 하수구에 총을 난사했다.


 5·18 기간 동안 사망한 군인은 모두 23명이다. 혹자는 이들 대부분이 시민들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오해한다. 일각에서는 '23명'이라는 숫자를 근거로 5·18을 폄훼한다. 그러나 5·18 당시 발생한 군인 사망자 23명 중 15명은 시민들과 무관한 사건으로 인해 사망했다. 15명 중 14명은 3차례에 걸쳐 발생한 군인 간 오인 교전으로 사망했으며, 1명은 오발사고로 사망했다. 군인 간 오인 교전이 빈번했음은, 당시 반란군인들에 의한 지휘체계 이원화와 군 기강 문란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실질적으로 시민들과의 충돌 과정에서 사망한 군인은 많게 잡아야 8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5·18 당시 시민 피해는 사망자 166명, 실종자 242명 (이중 70명 사망 인정), 부상 후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52명, 구속자 1,589명 등 5,000명이 넘는 규모다. 광주 시민들은 비무장 민간인을 향한 계엄군의 잔인한 학살에 분노하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러나 해당 총기는 사용되지도 않았고, 광주시민들은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킴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완벽하게 증명했다.


 1980년 5월, 아이러니하게도, 계엄군을 학살한 것 역시 계엄군이었다.


 이날 군인 간 오인 교전으로 9명의 전우가 사망하자, 11공수여단 군인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교도대 병력에게 보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송암동의 민간인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미 두 부대의 교전 과정에서 주변 민가에 있던 시민 5명이 총상 등의 부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심지어는 방해가 되었는지, 11공수여단 군인들은 근처 농가에 있던 칠면조 200여 마리와 젖소를 향해서도 발포했다. 그럼에도 11공수여단 군인들은 주변 민가에 침입하여 분풀이 대상을 찾았다. 마을 젊은이 김승후, 권근립, 임병철 세 사람이 끌려 나왔다. 세 사람 모두 시위는 물론이고, 총격전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임병철과 권근립은 집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11공수여단 군인들은 이들을 근처 하수도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권근립의 어머니는 아들이 끌려가서 살해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오후 3시경 11공수여단은 차량 통행자들을 제지하는 과정에서 김종철과 송정교를 살해했다. 이들의 시신은 5·18이 끝난 이후에야 발굴되었다. 김종철은 곤봉에 맞아 죽었고, 송정교는 딸과 함께 나주로 빠져나가던 중,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980년 5월 24일, 이날 광주 남구에서 9명의 무고한 시민이 군인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러한 계엄군의 비무장 시민을 향한 무차별적인 발포와 학살은 인류의 양심을 부끄럽게 하는 범죄행위였다. 우리는 1980년 5월 24일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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