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3일 정오, 한 대의 버스가 광주 외곽에 해당하는 화순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 버스에는 18명의 시민이 타고 있었다. 무고한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후, 그의 눈앞에 세상을 떠난 시민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던 것인지, 상무관에 모여있던 시신들의 장례를 돕던 송원여상 3학년 박현숙. 일신방직 노동자였으나 공장이 난리통에 문을 닫자 본가가 있는 화순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탄 고영자와 김춘례, 시신들을 안치할 관을 구하기 위해 화순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던 백대환, 황호걸 등이 버스에 타고 있었다.
화순으로 향하던 미니버스는 주남마을 인근에서 특전사 군인들과 조우했다. 군인들은 그 누구도 광주를 빠져나가거나, 광주에 들어갈 수 없도록 외곽지역을 지키고 있었다. 군인들은 버스 탑승객들이 광주를 빠져나가려 한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다짜고짜미니버스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버스 내부에서 저항의 의지가 없다는 신호를 보내도 총격을 멈추지 않았다. 발포는 버스기사가 사망하고, 버스가 고랑에 빠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날 해당 버스에 타고 있던 18명 중 15명이 그 자리에서 M-16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어떤 사람은 머리와 가슴과 하복부에 총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대부분의 사망자들이 여러 발의 M-16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군인들은 버스에 올라탄 후 쓰러져있는 사람들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검으로 시신들을 찔러 사망 여부를 확인했다. 박현숙과 손옥례의 시신에서는 대검에 의한 자창이 발견되었다.
군인들은 확인사살 후 생존해있던 시민 3명을 부대 주둔지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곧 상급자로부터 "귀찮게 왜 데리고 왔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군인들은 중상자 2명을 야산으로 끌고 갔습니다.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살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두 사람을 살해한 후 가매장했다. 손에 작은 부상을 입었던 단 한 사람만이 해당 버스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당 사건 이외에도 군인들에 의한 버스 학살사건이 더 있었다고 한다. 유일한 생존자는 한 군인으로부터 "오늘 오전에도 다른 버스에 탄 11명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군인은 그 이야기를 하며 어떤 말도 하지 말라고 위협했다.생존자는 곧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버스 학살사건의 진상은 생존자가 없어서 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주남마을 미니버스 학살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은 1988년 국회 5공 청문회에 출석하여 이 모든 사실을 증언했다.
"저희들이 차에서 살려달라고, 여학생들이 몇 명 있었거든요.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고 그러는데도 계속 총알이 날아오고. 버스에 탄 군인들이 대검을 들어대면서 너도 유방 하나 잘리고 싶냐 그러더라고요"
그의 증언이다. 그러나 5공 청문회에 출석한 현장지휘관은 "폭도들이 총격을 하며 돌격해와서 발포했다"고 답변했다.
1988년 5공 청문회.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한 야당 의원들이 물고문에 의해 살해된 박종철이 죽어간 바로 그 자리에 있는 작은 욕조의 용도가 무엇이냐? 묻자, "조사를 받다가 땀을 흘리면 더울까 봐 준비했다"고 답변했던 양심 없는 사람들의 시대였다.
현재 주남마을에는 미니버스 총격사건으로 사망한 시민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