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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Jan 04. 2020

1980년 5월 22일~26일, 해방광주

시민들이 스스로 공동체를 형성했다.

 철저히 고립된 외로운 섬 광주. 계엄군은 총을 손에 쥔 시민들이 ‘극렬한 폭도’의 행위를 할 것을 원했다. 그러나 공권력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이 바라마지 않았을 사건들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들은 도시를 청소했고 서로를 위로하며 음식을 나누었으며, 자발적으로 치안을 유지했다. 광주에 45개의 은행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은행을 털지 않았다. 시민들은 오히려 다친 이들을 위해 줄지어 헌혈을 했다. ‘해방광주’라고 불리는 시기다. 5.18의 위대함은 시민들이 억압에 대한 저항을 넘어, 스스로 공동체를 형성했음에 있다.

 '해방광주'의 시민들은 매일 도청 앞 분수대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매일 한차례씩 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5월 26일에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집회가 열렸다. 시민들은 앞으로 어떻게 이 상황에 대처해 나갈 것인지, 지혜를 모았다. 기록에 의하면 연인원 7만 명 이상의 광주시민들이 매일 집회에 참여했다고 한다. 주로 전남대 학생운동가들로 구성되어 있던 들불야학 활동가들은 광주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 '투사회보'를 제작했다. 당시에는 프린터가 없었기 때문에 등사기를 이용해서 유인물을 제작했다. 등사기 특성상 100장을 인쇄하면, 원본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윤상원과 전용호가 글을 썼고, 박용준이 예쁜 글씨로 같은 내용의 글을 여러 차례 적었다. 처음에는 들불야학이 위치하던 광천동 시민아파트에서 투사회보를 제작했는데, 5월 25일부터는 YWCA에서 더 좋은 인쇄기구를 사용했다. 전옥주, 차명숙, 박영순 등은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트럭을 타고 다니며 광주의 상황에 대한 방송을 진행했다.

투사회보 5, 6호


 5월 22일, 광주지역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계엄사 측에 사망자 명예회복 등을 비롯한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무기 회수를 진행했다. 시민군은 결성 하루 만에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행보에 불만을 제기했다. 5월 22일, 계엄사령부를 방문한 시민수습위 인사들이 궐기대회에 참여했다. 마이크를 잡은 장휴동 (태평극장 사장) 수습위원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결집한 시민들을 향해 “여러분 지금 당장 총기를 모두 반납하고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계엄사에 치안을 맡겨야 합니다!”라고 발언했다. 그의 발언에 많은 시민들이 야유를 보냈다. 이미 군인들이 시민들을 학살하는 광경을 목격했던 시민들이었다. 5·18에 참여해왔던 조선대학교 재학생 김종배가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빼앗았다. 그는 5·18 이전까지 민주화 관련 시위에 참여해본 경험조차 없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즉석연설을 시작했다.

 "지난 며칠간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죽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단순한 수습과 상황 종결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곧 이에 동조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전일빌딩과 YMCA 옥상에 있던 시민들은 하늘로 공포탄을 발사하며 김종배의 발언에 동의를 표했다.

 김종배는 이를 통해 5·18에 더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전남도청 앞 남도회관에 모여있던 대학생들과 함께 사태 해결에 대해 논의했다.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던 김창길이 “이번 일은 대학생이 시작했으니 책임을 다해야 할 일”이라며 학생수습대책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5월 22일 오후 4시 전남도청 1층 서무과에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학생수습위는 김창길 위원장, 김종배 부위원장, 정해민 총무, 양원식 대변인, 허규정 무기수거반, 명노근, 송기숙 고문 (전남대 교수) 등으로 구성되었다. 시민수습대책위와 학생수습대책위는 계엄사와의 협상을 통해 사망한 시민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폭도 누명을 없앨 것, 더 이상의 법적 처벌을 진행하지 말 것, 계엄군의 폭력에 대해 사과할 것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계엄사는 무장해제만을 요구하며 막무가내로 일관했다.

 5월 23일,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때의 궐기대회는 사실상 계엄사와의 협상 결과에 대한 보고대회로 진행되었던 전날과 달리, 나름의 격식을 갖춘 집회였다. 희생자에 대한 묵념, 각 계층 대표자 발언, 모금 등이 이루어졌다. 들불야학 강학 김영철이 노동자 대표로 마이크를 잡았고, 극단 '광대'의 김태종이 사회자를 맡았다. 극단 '광대'는 1980년 1월에 창립되었으며, 박효선, 유선규, 김선출를 비롯한 전남대 활동가들이 마당극을 만들어 공연을 진행하던 문화운동 그룹이었다. 이날 집회에서 김태종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외쳤고, 김영철은 노동자 대표답게 광주공단 노동자들도 함께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시민대표로 홍희담 작가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했고, 많은 시민들이 열광했다.


5.18 직후 배포된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 김태종 (5.18 사회자), 윤한봉 수배전단


 이날 집회는 윤상원, 이양현, 정상용, 박효선, 김태종 등이 녹두서점에 모여 기획한 집회였다. 이들은 대부분 197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광주지역 학생운동가들이었다. 예비검속 된 녹두서점 주인장 김상윤의 동생 김상집이 전남대 스쿨버스를 열쇠 없이 시동 걸어 광주를 누비며 집회를 홍보했다. 윤상원은 학생수습대책위원장 김창길을 만나 집회 진행에 대해 논의했다. 많은 동지들이 잡혀가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남은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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