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100명이 넘는 광주시민들이 총에 맞았다.
1980년 5월 21일, 군인들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도청 앞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전날 밤, 광주역에서 계엄군에 의해 살해된 두 사람의 시신이 리어카에 실려왔다. 광주역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총을 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일부 시민들이 호소했다.
곧 시민들이 금남로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때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시민대표를 선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전옥주, 김범태 등 4명이 대표로 선발되었고 이들은 도청에 들어가서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면담했다. 시민대표들은 계엄군 철수, 연행자 석방 등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도지사는 전옥주에게 "방송을 통해 시민들을 안심시켜 주면 잠시 뒤에 밖으로 나가서 위로의 말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을 한참 넘기고도 도지사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날, 전남도청 앞에는 기록상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모여있었다. 곧 계엄군에게 실탄이 교부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한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 11공수여단이 발포를 시작했다. 이때 전남도청 스피커에서는 1시에 맞추어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들의 사격은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10분간 지속되었다. 조준경을 교부받은 저격수들은 건물 옥상에서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했다.
1980년 5월 21일 100명이 넘는 광주시민이 총에 맞았다.
1980년 5월 21일, 이날 정확히 몇 명의 시민이 사망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명백한 것은, 이들의 행위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는 사실이다.
분노한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한 직후 즉시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총을 들고 탄약을 확보했지만, 교전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계엄군은 5월 21일 오후 5시 30분을 기점으로 전남도청에서 철수했으며, 광주 외곽지대로 이동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학살을 감추기 위해 광주를 철저히 봉쇄했다. 그 누구도 광주에 들어갈 수 없었고, 그 누구도 광주를 빠져나올 수 없도록 했다. 광주는 고립무원의 외로운 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