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7살 막내 셔틀 태워 유치원 보낸 지 30분도 안되어 원내 확진자 발생으로 하원 권고 공지가 왔다. 그 전 주에는 조리사 선생님과 동생반에서 확진자가 나왔었는데 이번에는 같은 반에서 확진자가 나온지라 급하게 유치원으로 달려갔다. 자가 키트 검사 후 음성 확인과 함께 재 등원 가능하다 하셨지만 그대로 하원한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지난주에 이어 또 확진자가 나와서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아이가 유치원을 못 가서 가정 보육하는 건 둘째치고 이런 상황에서 별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참 무력하게 다가온다.
코로나 이후 가장 많이 느껴지는 감정이 무기력이 아닌가 싶다. 특히나 모든 것이 통제 가능한 선에 있어야지 안정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코로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친구와 통화를 하며 그 친구는 질병에 대한 염려가 보통 사람보다 수위가 높은지라 코로나에 걸릴까 봐 코로나 내내 불안해했다. 나 역시 코로나로 불안하기는 마친가지지만 불안의 결이 사뭇 다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한 무력감, 그리고 그 상황에 따라 내 삶의 패턴이 무너지는 것, 그것이 내 불안 요소이다.
친구는 질병에 대한 염려가 빈번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아이들을 키우며 더 증폭되었고 나 역시 내 삶을 붙들고 내 통제안에 있어야 하는 성격이 아이셋을 키우며 그 통제 영역이 더 좁혀지고 강도가 세어질 조건이 되니 통제권 밖에 있는 것에 극도로 스트레스를 느끼게 됐다.
이쯤에서 불안이 가라앉았으면 좋으련만, 주말에 추가 확진자 소식이 들려온다. 무력감을 더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급하게 pcr검사를 받으러 갔다. 하필 영하권의 추운 날씨, 그리고 주말 확진자 폭증에 검사를 받는 사람 역시 줄이 어마어마하게 늘어져 있다. 아이와 남편은 차에서 대기하라고 하고 1시간 넘게 줄을 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특히나 어린아이들 손을 잡고 검사를 하러 오는 부모들을 보면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며 '제발 음성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2시간쯤 걸려 검사를 받고 돌아오니 온몸이 늘어진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추위에 떨어서인지 아무것도 할 의지가 사라져 버린 듯 녹아내리고만 싶다. 배달로 끼니를 챙기고 아이들은 자유시간을 주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안정한 행위는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음성 문자를 받았다. 음성 확인을 했어도 유치원에 보낼 생각은 없었다. 아이셋과 개학까지 남은 열흘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해본다. 그러면서 내 무기력함을 벗어나려 의식을 깨운다.
아이셋을 키우며 특히나 코로나 상황에서 내 무기력을 떨쳐내는 것은 그냥 움직이는 것이었다. 무기력이 찾아오면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물 먹은 솜 마냥 늘어져 버리는데 아이셋 키우는 엄마의 일상이 늘어진다는 건 곧 아이들 육아에 빨간불이 들어오는 신호와도 같다. 아이셋 육아는 24시간 풀가동되는 생산직과도 같다고 할까? 멈출수 없이 계속 가동되어야 하는 그 현장이 바로 아이셋 육아인 것이다.
의식을 자꾸만 살려낸다. 스스로 '무브 무브'하며 파이팅을 외친다. 몸은 움직이지만 마음이 자꾸만 가라앉는다. 가라앉는 마음을 살려내려면 몸을 계속 움직여야 한다. 무기력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는 것도 최선이다. 급하게 운동 예약을 하고 운동을 하러 간다. 그러고 나면 몸이 좀 깨어진다. 집으로 다시 돌아와 아이들 끼니를 차려주고 치우고 밀린 집안일을 해본다.
누군가에겐 잠깐의 무기력함이 필요한 순간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 무기력은 곧 정체를 말한다. 그 정체는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잠식시켜 버리기에 정체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자꾸만 깨어내려 애를 써야 한다. 아이셋 이상 키우면 우울증에 걸릴 틈도 없다는 말은 어쩌면 진짜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 번씩 내 마음이 게눈 감추듯이 살아지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현실은 눈앞에 항상 당도하기에 그 현실을 살아내려면 움직일 수밖에 없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살아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빨간 신호인 동시에 초록 신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멈춤이 아닌 초록불에 움직여 건너가야 하는 때인 것이다.
육아를 하면서 엄마들이 무기력에 빠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스스로 통제 가능한 상황보다는 그렇지 못한 상황에 자주 맞닥뜨리는 것이 육아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 빠질수록 무기력은 엄마의 몸과 마음을 잡아먹어 버린다. 그것이 가장 최악이다. 그럴 땐 나 스스로 구원을 하든 누군가 구원자를 대동하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주말부부인지라 평일에는 오로지 스스로를 구원해야만 한다. 주말에 남편이 있다고 해서 구원자 노릇을 자처하지는 않지만 혼자 있을 때보다 부담은 덜하다. 구원자 노릇을 해줄 수 있는 남편이 있기에 나 스스로를 좀 내버려 둬도 되는 상황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살아지는 것이고 무기력에서 건져내어 지는 것이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코로나 이후의 삶은 그전과는 사뭇 다르다. 살아가는 방식도 살아내야 하는 방법도 전과는 다르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고 우리 아이들은 그 시대를 열어나갈 준비를 부모를 통해서 한다. 앞으로 코로나와 같은 상황이 더 우리를 잠식시킬 거라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지는 지금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아이들은 배워나갈 것이다. 상황을 극변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그 상황에서 살아내고 버티는 그것, 그것을 알려줘야만 한다.
나에게 그 상황을 살아내는 건, 그 상황에 침몰되지 않도록 무기력감을 떨쳐내어 당당히 맞서는 것, 그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살아내는 방식을 물려주는 것이다. '우리 삶이 더 간단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캐럴라인 냅의 말은 좌절이 아닌 위로였다. 이제는 다시 살아낼 삶의 방법을 구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