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막내가 등산하다 손을 다쳤다고 한다. '어디? 얼마나 아파? 에휴 아프겠다 엄마가 호 해줄게, 집에 가서 약 바르자' 전형적인 ESTJ 엄마이기에 얼마나 다쳤는지 얼마나 아플 거 같은지 그리고 대처 방안에 대해서 자동적으로 반사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다쳐서 아픈 건 그 상처보다는 그 상처에 대한 부모의 시선과 대응이라는 걸 아이들을 통해 알아가기에 내 기질에 따른 자동반사에 제동을 걸고 아이 수준에 맞추려 배운 대로 아이에게 이야기해준다. (가슴에서 가슴이 안 되는 엄마인지라 머리에서 가슴으로 대하려고 연습하는 엄마다)
그 순간 큰아이가 한마디 한다.
"우리가 다쳐서 상처가 나면 엄마는 그 상처를 두배로 느끼고 아빠는 그 상처를 봐도 느끼고 보이는 게 없어. 우리는 상처를 그대로 보고 할머니는 상처를 100배로 봐"
와 아이의 직관이란... 사실 나는 딱 상처 난 정도만 본다. 하지만 반응은 배운 대로 그 이상으로 리액션해준다. 남편은 아이들이 다쳐도 보지도 않고 '괜찮아, 안 아파'하고 말아버린다. 그런데 할머니의 반응이 100배였다는 말에는 새삼 놀랬다. 친정엄마는 나보다 더 심한 ESTJ 스타일이시다.
나는 아파서 다치면 혹여나 혼날까 숨기느라 바빴지 엄마에게 보여줄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면서 컸다. 그렇다고 엄마가 내가 다칠 때마다 혼낸 일은 없다. 다만 어릴 때, 지금 생각하면 비염인데 그 당시 비염인 줄 모르고 '넌 등치 값을 못하냐'며 왜 맨날 감기냐고 볼멘소리를 자주 듣고 자라기는 했다. 차갑고 강인한 엄마도 할머니가 되면 달라지나 보다. 내 앞에서는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신 적이 없는데 손주들한테는 여과 없이 표현을 하시는 보니 말이다. 표현을 했었어도 내 기질상 그 표현을 케치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말이다.
아이들이 제법 크니 부모를 바라보는 시선이 명확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여과 없이 표현한다. 7살 막내조차도 너무나 명확하게 엄마 아빠에 대해 파악한 것을 주저 없이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통해 부모로서의 모습을 살피기도 하고 아이들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부모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큰아이는 얼마 전 수학학원에서 선생님께 혼난 일에 대한 감정 그리고 집에서 학원으로 가는 길에 마주하게 되는 상황(아파트 두 곳의 출입구와 중앙에는 또 다른 도로가 있는 환경이라 차가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도로이기에 아이에게는 불안요소인 듯하다)에 느끼는 불안과 자신의 감정상태까지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가 가지는 미지의 불안에 대한 대처와 불안의 실체를 좀 더 명확하게 보도록 조언도 해주었다.
나는 어릴 적 그런 상황에 대해 혼자 감내하고 혼자 불안을 다스리려 했기에 보호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고 그 느낌은 부모에 대한 원망이나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부정적 요소로 자리 잡았다(나는 불안도가 굉장히 높은 기질이다) 그 생각을 하니 아이가 자신에 감정에 대해 더군다나 6학년인 아들이 스스럼없이 이야기해주는 것이 대견스러웠다. 오늘 막내는 아빠에게 팩폭을 날렸지만 오래간만에 아빠 보호 차원에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오늘 등산 다녀오고 아이들과 잠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인왕산 기차바위(돌로 된 바위인데 잘못 더디면 굴러 떨어지게 되어 있는 구조)가 그려지며 불안이 마구 올라온다. 대처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엄마로서의 미숙함 내지 판단이 죄책감을 그늘을 드리우지만,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불안은 과감하게 버리기로 한다.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는 엄마인데 오늘은 전혀 경우의 수를 대비할 수 없이 마주한 현실이었으니... 그리고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역시 그 엄마의 그 아이들인가 보다. 기차바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 아찔한 순간을 복기하며 있지 않을 일을 엄마처럼 이야기하며 불안을 말한다.
엄마로서 가지는 내 불안을 잠재우려면, 통제되지 못하는 어떠한 상황도 용납하면 되지 않지만, 나 스스로 통제 영역을 내려놓으면 그것으로 인해 아이들이 분명 배우게 되는 것이 있다. 며칠 전 나와 비슷한 양육방식의 절친과 통화하며 내린 결론은 이렇다. 이런 엄마의 이런 아이들일수록 경우의 수를 대비하지 못한 상황을 겪어보는 것, 그것만이 엄마도 아이도 자랄 수 있다.
불안은 곧 안전에 대한 대비는 맞다. 특히나 아이를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느껴지는 불안은 아이를 지키는 요소가 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막연한 불안은 엄마의 마음과 연결된 아이도 고스란히 느낀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불안은 자칫 잘못하면 정체나 두려움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엄마가 불안에 맞설 수 있는 건 막연한 불안이 아닌 구체적인 불안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렇게 불안과 스스로 대면하면서 그 불안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 불안에 대한 대처방안을 명시하는 것, 그것만이 엄마의 불안은 잠재우는 방법이다.
그렇게 엄마가 불안에서 자유함을 찾을수록 내 아이도 불안에 대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불안의 실체를 혼자만 감내할 것이 아닌 아이와 함께 공유하는 것도 아이에게 불안에 대해 학습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아이들과 호기롭게 감행한 등산이 여러모로 배움의 터가 됐다. 평소 집 앞 산에 오르내리며 등산이란 것이 그 정도인 줄만 알고 도전했다가 막상 맞닥뜨린 현실이 아찔하기도 했지만 미지의 영역을 정복한 듯 엄마도 아이도 꽤 탐험적인 시간이 되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만 있었다면 결코 맛보지 못했을 정복의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맛이 아이들을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을 허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