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20대의 나를 동물로 비유한다면? 책 속에 나오는 질문이다. 20대의 나를 동물로? 무기력하게 내가 접한 세상만이 전부인 줄, 그저 이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양 나무에만 매달려 있던 나무늘보 같은 때였다고 할까? 나무늘보는 순하디 순해 보이지만 날카로운 갈고리 세 개를 가지고 그 갈고리로 나무에 매달려 있다. 나무에 매달리기 위해서는 튼튼하고 둥근 갈고리가 있어야만 하는 거다. 매달리는데도 분명 에너지가 쓰인다는 말이다.
무기력이란 것이 에너지가 없는 것을 말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에너지가 소진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기력을 택한 것일 수도 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무기력이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병적으로 무기력에 시달리면 병원과 약이 필요하겠지만 스스로 무기력에 가라앉는 건 어쩌면 더 이상 할 방도가 없기에 스스로 자처하는 무의 상태일 수 있다.
20대의 내가 그랬다. 별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어 어두운 방구석에 박혀 지낸 시간도 있고 무언가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보지만 그렇다고 무기력이 내게서 떨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20대 초중반 나에게는 무기력이 주특기이자 무기였다.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주어진 환경이 뒷받침이 되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최악은 그런 나를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고 누구도 내 인생에 대해 떠들어주지 않았다. 누군가 내 인생을 정의하는 것도 거부해야 하는 노릇이지만 진심으로 그 사람에 인생에 끼어들어 정신을 차리게 해 줄 누군가는 때론 너무도 절실하다.
그렇게 나무늘보처럼 아까운 시절을 보내고 20대 마지막에 결혼을 하고 30대 초반의 큰아이를 낳으면서 내 무기력은 나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 하나, 무기력이 더 이상 내 무기가 될 수 없었던 거다. 무기력이 더 이상 나를 지탱하는 에너지가 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활기라는 에너지를 장착하기 시작한다. 사실 활동성은 타고난 내 에너지였을 수 있으나 여러 가지 환경과 내적 요인으로 인해 빛을 발하지 못하다 그 빛이 더 이상은 어둠을 감당하기 힘들어 내 안에서 비집고 나온 것이다. 그렇게 내 에너지의 흐름은 뒤바뀐다.
그때부터 지난 내 무기력의 시간들이 너무도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한 번씩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 가슴에 아쉬움이 한가득 들어차 버렸다. 후회는 또 다른 무기력을 불러올 여지가 충분히 있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 활기로서 지난날을 보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나쁜 성실함은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쁜 성실함이라니... 성실함에 어떻게 나쁘다는 표현이 쓰일 수 있지? 너무도 의아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책 제목만으로도 흥미가 생긴 책인 것도 분명하다. 나쁜 성실함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책을 당장 구해서 읽었다.
책에서는 구구절절 나를 마주하는 문장들이 넘쳐났다. 특히나 왜 그렇게 에너지 넘치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답도 명료해졌다. 인정과 완벽주의, 강박을 감춘 무기력이 나쁜 성실함으로 뒤바뀌었을 뿐이라는 것.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벽에 막혔을 때는 무기력 속에 나를 숨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무기력에서 활기를 되찾고 나서는 그 무기력 때문에 주어지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들에 집착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인정 욕구가 높고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온갖 강박에 시달리며 그렇게 나만의 확고한 기준과 틀을 만들어 나갔다. 그것이 나를 지켜주는 힘이고 지탱하는 에너지였기에 나를 채찍질하며 끊임없이 경주마처럼 달린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난 여전히 인정을 원하고 성공을 바란다. 다만 그 속도감은 조금 늦추었을 뿐이다.
이 책을 본 이후로 나 스스로 고수한 철칙이나 금기사항을 한 번씩 지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음을 안 먹는 게 문제지 깨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깰 수 있는 것들이다. 가령 관계 패턴이라던지 절대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걸 해보므로 그것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 등, 나를 옳아 매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벗어던지려 작년 한 해 꽤나 애를 썼다. 어쩌면 나를 지킨다고 하는 것이 나의 한계를 좁게만 만들고 나의 능력치를 가두는 꼴이었음은 금기를 깨고 나서야 알았다.
스스로 절대 아닌 것, 절대 고수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한 번의 재고가 필요하다. 그것이 과연 자신을 위한 것인지 말이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확고하다 생각하는 생각이나 가치관은 어쩌면 스스로 이룰 수 없거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자기기만이자 자기 불신에 대한 방어일 수 있다.
내가 100을 채우려 할수록, 그것을 내가 아닌 누군가 혹은 다른 어떤 환경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채워질 수도 있는 부분을 자기 기만의 사고로 움켜쥐었다.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여지를 주지 않았다. 왜냐 내가 100인데 굳이 누군가의 필요를 원치 않았던거다. 이렇게 오만할 수 있다는 것이 기이할 뿐이다. 그럴수록 난 외로웠고 그럴수록 난 공허했다는 것을 책속 문장을 통해 절실히 알았다.
여지를 주지도 않고 틈도 보이지 않기에 누군가 끼어들 자락이 없었다. 나의 외로움과 공허함은 스스로 자처한 나쁜 성실함의 결과였던 것이다.
나를 옭아매는 성실함이 아닌 나를 살게 하고 또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한 성실함의 영역을 달리해야 한다. 그것만이 나 홀로가 아닌 함께 살아가고 외롭지 않은 길이다.
나에게 나쁜 성실함은 외로움 그 자체였다는 걸 알게 해 준 이 책이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