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막내가 아빠에게 건담을 조립해 달라고 한다. 지난 어린이날에 건담 두 개를 사서 하나는 바로 조립을 했고 나머지 하나는 어렵다며 차일피일 미루던 남편이다. 첫 번째 건담도 조립을 하라고 닦달을 하고서야 만들어 준건 안 비밀이다. 남편은 항상 그런 식이다. 오늘도 여지없이 남편의 결혼생활 내 변함없는 패턴이 나온다.
"오늘 중으로 만들어줄게."
이 말은 한마디로 안 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된 말뿐임을 너무도 잘 안다. 몇 마디 던졌더니 큰애에게 "아빠가 부품을 떼어 줄 테니 조립은 네가 해라."라며 여지없이 자신의 일을 누군가에게 떠넘긴다. 남편은 항상 이런 식이다. 14년간 한결같이 변함없는 남편의 모습은 어느 날부터 숨이 막히도록 나를 옥죄어왔고 그 옥죄임을 푸는 방법은 그런 남편을 포기하거나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닌 남편 스스로 자신을 직시하도록 정곡을 찌르는 잔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같이 살기 위해서는 내려놓음이나 포기보다는 어떻게든 고쳐 쓰겠다는 나의 의지가 그 사람과 더 살 수 있게 하는 방편이다. 나한테는 말이다.
다행히 남편은 그저 한 귀로 듣는 잔소리와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인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꿈쩍도 안 하는 사람인데 요즘엔 내 잔소리가 자신에 귀에 거슬리긴 하는 거 같다.
마침 큰아이가 숙제를 하며 같은 실수를 번복한다며 애 먼 소리를 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주구장창 조언을 해왔던 바다. 아빠의 건담 만드는 일로 시작된 내 잔소리는 큰아이 에먼 소리에 증폭해버리고 만다.
"그러 줄 알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지 않아? 넌 왜 너 스스로에게 자꾸 피해를 주니?"
라며 알아들을까 싶은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렇다. 아직 큰아이는 자라는 새싹이니 얼마든지 개선의 여지가 있지만 이미 클 때로 커버려 개선의 여지는커녕 더 망가지지나 않으면 다행인 남편이 탁 수면 위로 떠오르며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는 글감이 딱 떠오른다.
남편에게 "오늘도 글감을 제공해 줘서 고마워."한마디 하고 안방으로 들어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자신에게 떠오르는 자신만이 해결할 삶의 질문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주변인만 힘들 뿐이지 정작 자신의 삶은 너무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냥 태어난 김에 사는 사람처럼 죽음을 맞이할 때도 아마도 아무런 여한 없이 눈 감으려나?
자신이 짊어져야 할 것들을 자꾸만 타인이나 환경에 토스해 버리는 스킬은 가끔은 너무도 부러울 정도다. 그렇게 자신의 것을 토스해 버리니 자신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아니 허무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왜 허무한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한순간의 바람처럼 지날 뿐이다. 바람은 바람대로 그 사람을 위해 찾아와 주는데 그 바람을 맞는 사람은 전혀 바람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렇게 바람은 안타까워하며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맞이하는 것에 애쓰지 않는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과업을 다해야 한다. 사람마다 그 과업의 수준과 정도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 그 자체로의 과업은 스스로를 알아 스스로 어느 경지에 오를 만큼의 애씀은 필수적으로 해내야 한다. 세상에 그저 태어난 영혼은 아무도 없다. 사람마다 존재의 이유 하나는 살면서 남기고 가야지 그 삶이 비로소 완성되지 않을까 싶다.
환경을 탓하고 타인을 탓하며 사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는 것도 존재 이유를 묻지고 따지지도 않는다. 그저 그렇게 '나 이 세상에 왔노라, 나 이렇게 세상을 떠나노라, 라며 이름 석자로 출생일과 사망일만 남기며 갈 뿐이다.
무지란 나와 세계의 본질을 명료하게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래된 질문/다산초당
세상은 온갖 질문들로 나에게 말을 건다. 그 질문에 응답할 수 있는 자는 삶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고 사는 자이다. 그 근본적인 물음에 닿지도 못한 자는 스스로 세상에 대해서 유식을 떠들어 대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무식의 근본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안다고 하는 자는 모르는 자요, 모른다 하는 자는 아는 자요, 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여전히 화두가 되는 것은 '나' 자아에 대한 의구심이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삶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시하는 철학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인류와 멀어질수록 철학자의 고찰은 더욱 애탈 것이고 목마를 것이다.
당신은 변명과 핑계가 많은 사람인가? 사람은 변명과 핑계를 일삼기 위해 지음 받지 않았을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라고 했지 온갖 핑계로 자신의 것을 미루라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 수고를 그 누군가 감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변명과 핑계는 자신을 갉아먹는 수단일 뿐이다. 그 수단을 거두어들일 때 비로소 추수가 가능한 삶을 살아낼 것이다.
이유가 많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유가 많은 이유는 스스로 자신을 이해시켜할 할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이해한 사람은 굳이 이유를 말하지 않고 핑계와 변명을 하지 않는다. 나를 자꾸만 이해로 무장하는 것은 그 이상의 전진을 거부하는 것이고 변명과 핑계 역시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일 뿐이다. 자신을 보호하는 갑옷처럼 감싸고 있는 그것들은 결국 그 갑옷 안에 스스로를 갇히게 만들 뿐이다.
자기 자신을 다루는 실력, 현대인들이 길을 못 찾고 방황하며 소모적인 삶을 사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무지와 다룰 줄 모르는 무능 탓입니다. <오래된 질문/다산초당>
스스로 진리라 믿고 걸치고 있는 갑옷이 과연 누구를 위함이며 무엇을 위함인지 한 번쯤 고민하며 자신에 질문에 다가서는 5월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