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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May 25. 2022

40에는 긴머리


인스타에서 <40에는 긴머리> 책과 저자에 대한 피드를 자주 보았다. 단순한 호기심이 이 책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이제 막 사십이 된 사람이 쓴 책이려나 싶어서 별 기대가 없기도 했다. 마흔셋을 지나고 있는 나는 이제서야 사십대라는 삶을 이해하는 중이기에 막 사십이 된 사람의 이야기는 감흥이 없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에서다. 막상 책 뚜껑을 열어보니 저자는 이미 40대 후반을 지나고 있었다. 갑작스레 책이 더 읽고 싶어져 옆집 언니의 사는 이야기를 듣는양 책을 읽어 나간다.


<40에는 긴머리>


당신은 어른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어른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내 기준에서 어른은 세대를 통틀어 나보다 약자에게 눈높이를 맞춰 배려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지랄맞은 성격의 남녀노소에 대해 덩달아 분개하지 않고 차분함을 유지하며 그이들을 이해하려는 역시나 넉넉한 마음을 가진 자다. 때론 정의에 차서 옳고 그름에 대한 의견을 내세울 수 있는 점도 포함하고 싶지만... 내가 정의롭지 못한 성격이라 자신이 없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뭐고 진정한 어른이란 뭘지, 어떤 어른이 되고 싶고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는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기에 인생은 넘 고달프고 진정한 어른 따위를 논할 만큼 삶이 여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이들을 감쌀 수 있는 소수의 어른만 제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난 제정신을 갖춘 어른으로 살아낼거다.


마흔이 과연 어른이라고 할수있을까 싶지만 본인 앞가름 외 세상 앞가름 정도는 가능해야 된다고는 본다. 마흔 그리고 사십대는 진짜 어른으로 가는 성장통의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러기에 아직 완성이 덜된 미완의 어른이라 말하는 게 가장 알맞을듯 싶다. 완성보다는 미완이 오히려 만들어가기 쉽지 않을까?



<40에는 긴머리>

개인적으로 마흔의 어른으로서의 가장 큰 회한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계산에 밝아졌다고는 할수있다. 나는 세상 물정 모른채 20~30대의 삶이 쭉 지속될 줄 알았다. 그렇게 꿈같은 현실을 살다 사십대에 들어서 뒷통수 맞듯이 세상한테 내쳐진 기분으로 우울한 때가 꽤 오래갔다. 특히나 부동산!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사십대로 살아가는 중에 가장 아쉬운건 부동산이다.


한마디로 현타 맞은 사십대는 삼십대에 놓친 것들이 유령처럼 맴돌고 그때 이랬을걸, 저때 저랬을 걸 이라며 밤마다 속 터지는 마음을 부여잡아야 했다. 지금은 '그래, 이제라도 안게 어디냐. 지금이 나중되서야 후회로 물들지 않게 열심히 살아보자.'라는 다짐으로 매일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다.



<40에는 긴머리>

먹는 것 역시 현타를 맞은건 매한가지다. 먹고 싶은 것을 먹었던 30대와는 다르게 사십이 되고나서 어느순간 라떼를 마실때마다 속이 더부룩해졌다. 이 증상이 나이든 흔적이라는걸 나보다 더 나이 많은 언니의 한마디로 알게 되었다. '사십 이후로 유당 소화력이 떨어져서 라떼를 못 마시겠어.' 아 그런거였구나. 어느날인가부터 크림파스타를 먹으면 하루종일 속이 부대끼고 어느날 라떼를 마신 후 신물이 올라왔던 것이 나의 노화의 한 현상이었구나. 이런!! 한동안 먹는 것에도 제약이 걸리는 것에 화가 났지만 금지가 아니라 몸을 위해 적당히 조절하라는 신호로 받아드리고 몸의 맞추고 있다. (사실 먹고 부대끼니 그러느니 자연스레 줄이게 되더라)



<40에는 긴머리>

이 문장을 보고 얼마나 환호성을 쳤는지! 어쩜 이리도 찰떡같은 비유를 하셨는지 저자에게 놀랄뿐이다. 나도 그랬다. 막 사십이 되어  뭣모르고 발을 담궜다 뜨거움에 후다닥 빼버리고 얼 빠지진듯 이제 어쩌지? 사십이 이런거란 말이야? 라며 괜한 나이탓만 했었다. 어쩌면 너무도 뜨거웠을 20~30대를 적당히 열기를 빼고 살라는 의미로 미지근한 정도의 40대를 허락한건 아닌지 말이다. 50대에는 아마도 뜨거움을 즐기며 첨벙 들어 앉아버릴지도 모르지말 말이다. 인생은 뜨거운것이야 이러면서...


40에는 한때를 그리워한다. 잘나가던 그때, 그리고 뭐든지 가능했던 그 어느때를 말이다. 소싯적 잘 나간 적이 없던 1인이라 그런지 잘나가고 싶은 열망은 여전하다. 굳이 잘나갔던 한때를 쥐어짜보면 스물 일곱, 서른 일곱, 이렇게 10년 주기였던 거 같다. 그럼 마흔 일곱을 기대해도 되려나? 난 지금도 잘 나간다고 생각한다. 자아도취격인 그 무엇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즐겁고 신나는 때이니 전성기 맞지 뭐. 지금 사십대가 아쉽고 아쉬운 분은 한때를 되살리는 기회로 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젊을 때 전성기는 스스로 빛나지만 중년의 전성기는 그 빛이 누군가에게 더해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40에는 긴머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책 속에 이야기를 통해 <일일시호일>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심미안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주인공. 어쩌면 작고 초라하지만 은은하게 향기로운 삶. 그런 삶을 말이다. 어쩌면 간이 안된듯 슴슴하지만 그 슴슴한 맛은 오래도록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마흔의 삶은 기대와는 많이도 달랐다. 그 기대는 내가 품은 것이고 마흔이 실망감을 안겨준 건 결코 아닐거다. 다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현실에 매우 가까운 나이였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는거 뿐이라고 할까? 꿈은 꾸되 현실에 반영되지 못한 혹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는 꿈은 주변인을 조금 고달프게 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아야 하지 않나 싶다. 나 역시 꿈만 꾸다 경제적이라는 문제에 올초까지 심히 고민을 했었다. 꿈을 이룰 것이냐, 현실에 타협할 것이냐!




아이셋 커갈수록 학원비는 속절없이 올라가고 내 주머니 사정과 상관없이 치솟는 물가에 꿈을 포기해야하나 싶은 마음에  양자택일해야 하나 고심했었다. 하지만 꼭 선택과 포기만은 답은 아니더라.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남자라면 이야기가 또 다르겠지만 가장으로서의 부담이 아닌 그저 가장을 돕고 싶은 부수입 정도의 벌이는 꿈과 현실안에서 충분히 타협이 가능한 선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사실 어느날 누군가 블로그의 포스팅에서 '고정수입'이라는 것이 내 눈에 딱 들어왔다. 내 고정수입이라고 해봐야 존재감이 크지 않기에 그저 통장에 입금만의 흔적일 뿐이라... 고정수입이라... 어느정도의 고정수입이 있으면 될까 싶으면서 다시 한번 현실에 대한 대안을 간구했었다. 아마도 이 대안은 곧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40에는 긴머리>라는 제목 자체가 어쩌면 우리가 흔히 아직까지도 깨고 있지 못한 고정관념에 대한 혹은 이건 이래야 한다, 저건 저래야 한다 혹은 이건 아니지 않니? 라는 맹몽적 낭설에 대한 타파를 외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39살에 생애 처음으로 긴 머리를 했었는데 이 참에 그 길이까지 도전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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