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만나게 된 건 지인 상담사 선생님 인스타 피드에서 입니다. 제목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 당장 도서관에서 빌리게 되었지요. 제목만으로는 전혀 감이 오지 않은? 혹은 제목만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책이지만 내용은 굉장히 심오합니다. 읽을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책인데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책이기도 합니다.
엄마에게는 희생이 늘 따라옵니다. 그 희생이라는 것이 부족하거나 모자랄 때는 죄책감도 여지없이 따라 붙고 말입니다. 엄마에게 희생은 모성일까요? 아니면 모성이 희생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엄마로서는 임신하는 과정부터 희생의 시작이 아닌가 싶습니다. 희생이지만 희망적인 희생이요 기대적인 희생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 희생은 임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출산을 하고 난 후는 더 가혹하게 엄마들을 옭죄입니다. 모든 것이 엄마 탓이 되기 쉬운 것이 바로 육아이니 말입니다.
엄마에게 희생은 곧 아이에 대한 사랑일테고 말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아이가 부족하거나 잘못 되거나 아프기라도 할라치면 모든 책임의 화살은 엄마를 향해 쏘아집니다. 그렇게 엄마는 스스로에게 화살을 쏘는지도 모른채 모성을 빌미삼은 희생을 요구받거나 스스로 희생의 아이콘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모성을 가장한 희생 내지 희생이라는 모성은 엄마와 아이 둘다에게 옭아매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희생적인 모성의 아이콘은 스스로 자랑스레 모성이 계급처럼 완장채워 질 것입니다. 반면 아이는 어떨까요? 엄마의 만들어진 혹은 재탄생된 아이도 그럴까요? 겉은 그럴싸하게 꾸며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그럴싸함이 전부 엄마의 것이라면 말입니다?! 아이는 과연 아이대로 아이다운 아이스러운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엄마의 것이 치장된 아이가 아닌 아이가 아이 스스로 취해서 단장한 것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엄마가 주는 건 사랑일겁니다. 좋은거니깐, 너를 위한 거니깐, 엄마가 너에게 나쁜걸 주겠니? 라는 타당성을 엄마 스스로 부여하며 당연스레 아이에게 좋은 온갖 것을 줍니다. 엄마는 너를 위하니깐 이라는 진실앞에 거부할 아이가 있을까요? 나를 위한다는데, 엄마가 좋은거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렇게 엄마를 입으며 아이들은 엄마를 입은 채 자라게 됩니다. 아이를 위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엄마가 좋은걸 주는 경우도 있지만 아이가 원하니 아이가 원하는대로 다 주는 엄마의 부류도 있습니다. 아이가 원하니깐 아이가 행복해하니깐 말이죠. 어느 것이 되든 넘쳐남은 모자람만 못하는 건 세상 진리인 듯 합니다. 모자람은 차라리 아이 스스로 부족한 걸 알아채고 그것을 채우려 할테니 오히려 나을까요? 순전히 엄마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말라니 그 모든 것의 적절함을 스스로 조절해야 만 하는 난관에 차라리 백기를 들고만 싶을 것도 같습니다.
사실 이런 류의 육아서는 엄마를 힘들게 합니다. 엄마를 어렵게 만듭니다. 안그래도 현실에 치인 육아의 어려움으로 부화뇌동하는 순간이 천지인데 어렵디 어려운 이론을 제시하며 이러면 문제고 저래도 문제라고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읽어야 하기도 합니다. 읽는 육아서를 따라하는 것이 아닌 저자마다 이야기하는 육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자기만의 육아관을 세워나가면 되니 말입니다. 애초에 엄마 스스로 육아관을 가지고 육아서를 본다면 사리분별이 가능하다 봅니다. 일례로 작년에 어떠한 고구마같은 육아서를 읽고 나서는 오히려 그 저자의 방식이 나와는 상당히 걸리가 멀구나 느꼈으니 말입니다.
얼마전 예비중등인 큰아이가 그러더군요. 엄마는 여름이(반려견)에 대한 사랑이 과하다고 말이지요. 나름 철칙과 원칙을 고수하는 반려인이라 여기는데 사랑 표현에 있어서 만큼은 자유롭긴 합니다. 특히나 반려견 같은 경우는 사랑을 재거나 고민하지 않고 직진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깐요.
반면 아이셋은 좀 다릅니다. 엄마는 하나이고 아이가 셋이다 보니 자연스레 누군가에게 애정을 줄때 다른 아이가 신경이 쓰이기도 하며 남몰래 먹을 걸 하나 더 챙겨준다거나 하니 말입니다. 제가 낳아 기르는 아이셋이니 사랑의 크기는 동일할지 모르나 사랑의 방식이나 사랑의 이유가 전 셋 다 다릅니다. 아이마다 고유한 기질이 있으니 사랑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려견은 하나뿐이니 그저 한정없이 애정을 주고 또 말 못하는 짐승이니 더 살피게 되는 것이 큰아이 눈에는 과한 사랑이라 여겼나 봅니다. 반려견은 변려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아이는 아직 배우지 못한 걸까요?
반면 아이는 다릅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은 한없는 사랑과 정성을 보이며 애를 썼지만 아이가 엄마와 독립이 시작되어지는 사춘기쯤 부터는 사랑과 정성에 느슨한 태도로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아이 스스로 사고하며 판단하고 아이 주관대로 아이만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비중등 아이에게 엄마가 공부나 숙제에 관여하길 원하는지 아니면 맡기길 원하는 지 물으니 아직은 온전히 맡겨지는 것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 하더군요. 사실 초6부터 관여는 하지 않고 관망하며 체크는 하고 있었답니다. 사실 저의 불안의 확인용이지 아이는 아이대로 자신의 몫을 잘 해내고 있는 걸 학교나 학원 선생님 통해 듣고는 있었거든요. 그리고 아이 기질상 잔소리 한다고 더 잘하는 아이가 아이라는 걸 아니깐요. 전형적인 FM기질이라 숙제에 대해서는 해야만 하는 걸로 아는 아이랍니다.
큰아이는 저의 의사를 자주 묻습니다. 저와 관련해서가 아닌 자기와 관련해서 엄마 의견을 묻는 것인데 전 되려 아이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건 너의 일이고 너의 선택이니 엄마의 의견은 상관없다고 말입니다. 아이가 엄마의 의견을 묻는 이유는 분명 엄마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엄마의 의견대로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할 것입니다. 엄마 의견대로 하고자 하는 아이는 여전히 엄마의 사랑이 받고 싶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이라는 걸 아이 스스로 알아채 버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마흔을 넘어서까지 엄마가 어릴 적 저에게 하시던 볼멘소리에 가끔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라는 엄마의 말은 저에게 아무것도 되지 못한 죄책감을 엄마에게 가지게 했으니 말입니다. 뭐라도 되서 엄마에게 보이고 싶었던 어릴 적 그 아이가 오래도록 저를 떠나지 못했건 것이지요.
기대만큼 자라지 않은 엄마의 아쉬움과 기대를 할 만큼 잠재력을 가진 자녀에게 길이 되어주지 못한 부모에 대한 저의 아쉬움이 제 아이를 키우면서 접점을 찾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기대는 엄마가 스스로 가진 기대이니 자녀인 제가 그 기대에 굳이 응할 필요도 없고 제 아이에 대한 기대 역시 저 스스로 제 인생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킨다면 아이도 그 기대를 충족할 방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춘기인 큰아이는 생각보다 스무스하게 지나고 있습니다. 중2가 되면 달라질 지 모르나 주변 선생님들 대부분이 무난하게 지나갈 거라 하시고 저 역시 아이 기질상 그러리라 예상합니다. 사춘기 전에 엄마말을 잘 안들어서가 아닌 아이 스스로 선택하고 아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성이 순하고 모나지 않은 기질이라 엄마가 나서서 굳이 하지마라, 안된다 했던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아이는 아이 기질답게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는 거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큰아이에게는 그저 잘 자라줘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기대가 자꾸 되지만 그 기대는 엄마 혼자만의 욕심으로 고이 접어 내비치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아이다운 모습 그대로 자라는 것이 아이에게는 가장 큰 축복이자 앞으로 독립할 아이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지지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 절반채 읽지 않은 책이기에 후에 나올 아빠의 사랑에 대한 부분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