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수록 내가된다
<매일 읽고 쓰기>를 다짐하고 1월을 보냈는데 명절과 함께 매일 쓰는 일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아이들이 방학이기도 하고 1월초부터 이어진 긴 방학에 읽기는 하되 쓸 여력이 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쓰는 것에 익숙해져 매일 쓰던 것이 무색할 만큼 단 한줄도 쓰지 못하고 3주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글을 쓰기 위함이었을까요? 공교롭게도 새롭게 읽고 있는 책 세권이 글쓰기 관련 주제입니다. (은유 작가님 신작까지 하면 4권이네요) 그냥 글쓰기도 아닌 치유의 글쓰기에 관련한 책들이랍니다.
사실 지난 3주동안 여러모로 심적인 고뇌가 깊기도 했습니다. 나로 인함이 아닌 타인으로 인함이기에 정답을 알지 못해 더 애를 태웠지만요. 대화로 풀어낼 계기가 있는 것도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 서로 각자의 미묘한 감정으로 빚어진 말하지 못하는 혹은 말할 수 없는 미묘한 신경전의 날것이었기에 그저 미궁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답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선을 그으며 그저 서로에게 심적으로 해가 되지 않도록 계산적인 태도와 사무적인 대응으로 저 스스로는 합의를 보았답니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어려움도 있지만 스스로도 알지 못한채 불거지는 미묘한 신경전이라는 것도 무시를 할 수 없더군요. 그 신경전의 날카로움은 정작 상대에 대한 앎을 얻기보다는 상대를 자신의 신경대로 파악해 버리는 가장 최악인 실수를 범하게 되기도 하고 말이지요.
아마 저도 사람이기에 두가지 실수를 다 범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점이라면 굳이 내가 알아낸 앎을 상대에게 엿보이는 행동이나 말은 자중하지요. 말 그대로 제 판단일뿐이니깐요. 하지만 여실하게 그 내색을 하는 상대를 만나게 될 때 가장 당황하게 되는 거 같아요. 한마디로 자신의 기준과 생각으로 타인을 재단해버리는 무례에 대한 당황이지요.
살면서 딱 두번 겪게 되었는데 그 파장이 저에게는 참 크게 다가왔어요. 왜냐면 저보다 연장자이고 권력을 쥔 입장이라 반박의 여지를 전혀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보여지는 것 외 그 사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 그 사람안의 있구나를 깨닫게 되기도 했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그 이면을 과연 알까 싶으면서요. 아마도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아닐까 싶어서 더 애석할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내 안의 것이 해결되지 못한채 마음을 어지럽게 하면 글로써 풀어내지 못합니다. 아직 확신이 없으니깐요. 안에서 정리가 될 때까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지만 결국에는 엉키고 엉킨 것들을 풀어서 문자로 이렇게 나열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책 덕분이었을까요?
공황장애의 어려움을 본능적인 이끌림으로 작가 스스로 치유해 낸 이야기는 지난 시절 저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알수없는 내면의 웅크림은 저를 무작정 걷게 했고 그 다음은 책속에 빠져 들게 했으며 그 책에서 건져 올린 문장을 통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문장이 녹아들게 하며 저를 글의 세계로 인도했습니다. 지금도 그 맥락이구요.
작가의 사적 사유의 것은 작가의 것만이 아닌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사적 사유로 옮겨오게 합니다. 그것이 글이 주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작가의 날 것은 독자의 날것을 보게 하고 그 날것의 실체를 파악해서 더 이상 그 날것이 날것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죠. 문장치료라고 할까요? 저에게는 책 속 문장이 곧 저의 진통제이자 치료제였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렇습니다.
먹고 자고 입는 것 그 이상의 생존을 원하는 자는 분명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살아낸 역사이고 싶고 살아낸 증거가 되고 싶은 자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런 자들의 투쟁은 생존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정신적 생존을 위한 투쟁! 그것만이 삶을 의미있게 만들고 삶을 더 구체적으로 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자의 삶은 삶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삶이 삶으로 옮겨가며 또 다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 그것이 정신적 생존의 흔적이자 증거입니다.
글을 써 보셨나요? 거창하게 작가가 쓰는 글을 말하는 것이 아닌 나의 사유로서 나의 이야기를 글자로 표현해 보신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나요? 글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닌 내가 읽히기 위해 쓰이는 것이 첫번째입니다.
Everything or Not Thing
나는 전부일수도 전무일수도 있습니다. 더불어 삶도 모든것이거나 아무것도 아닐수 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되려 우리를 이도저도 아니게 만듭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반대의 것을 알지 못하기에 혹은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외면하게 되지만 외면한 것이 나를 힘들게 만들기 마련입니다. 차라리 모든것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명제를 가슴속에 품고 있다면 사는데 겪게 되는 일에 유연함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한쪽으로 치우친 사고나 생각을 가지고 살다 다른편의 것들이 떠오르며 힘든 시절이 많았습니다. 그저 인정하면 되는 것이고 모든 것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 일수도 있다는 전제를 가진다면 전혀 이해되지 않을 것도 아니었습니다.
불행은 이야기되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을 때만 존재합니다. 불행이 이야기되어지고 날개를 편다는 것은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것에 적극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어쩌면 진짜 불행보다는 불행의 그림자로 비롯되어 스스로 불행의 구렁텅이를 만들어내는 때도 분명 있으니깐요.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이야기를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이야기를 하겠다는 다짐은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야기함으로써 흘려보내겠다는 자기치유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지난 2주간을 생각하면 저 혼자 애 끌이며 불행의 구렁텅이를 자처한거 같습니다. 스스로 판 구렁텅이지만 그곳에 갖은 핑계와 이유를 심으며 말입니다.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은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아닌 나 스스로 그 이야기에 대한 맺음을 하겠다는 자기책임이기도 합니다.
결국 내 삶이고 내가 살아가야 하는거니깐요.
글은 나로 살게 하고 나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며
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작업니다.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것이 아니지요?
어떠세요? 마음속에 품고 있는 불행의 씨앗이나 그늘이 있다면 주인공이 되어서 한번 자기 이야기를 써보지 않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