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연민

by 진주

퇴근길 아파트 앞에 저만치 부부가 보인다. 신혼부부인가 싶었는데 가까이 갈수록 아는 얼굴이다. 앗!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막내아이 친구 엄마,아빠인데 아이없이 부부만 있는 모습이 지금까지 아이와 동행할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에 괜시리 마음에 이상한 물결이 친다. 아이들에게 항상 잘 웃는 친구엄마이긴 했는데 남편을 마주하고 그리 다정하게 웃는 모습이 내 뇌리에 찍힌다. 집에 들어와서도 자꾸만 그 미소가 잊혀지지 않는다. 가면 생각해보니 나는 남편에게 그렇게 미소를 보인 적이 없던 듯 하다. 애초에 남편이라는 이름이 붙고 부터이지 않나싶다. 뇌리에 미소는 잊혀지지 않고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하얼빈> 이후 김훈 작가님에 대해 알고자 선택한 두번째 소설인데 단편인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재미지게 읽고 있는데 이 문장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져나온다. 결혼 15년 넘도록 자기연민에만 빠져 사는라 서로를 돌볼 연민은 미처 누리지 못했나 싶다. 그 연민이 아이친구 엄마의 남편을 향한 미소와 묘하게 겹친다. 애초부터 남편이란 작자에게 미소는 허락되지 않은걸까? 또 생각에 잠긴다. 미소에서 연민으로 이어진다. 묘하게도 말이다.


아직 젊고 아직 기운이 넘쳐 흘러
자기 연민이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늙고 기운없으면 서로에 대한 연민으로 서로가 측은해지려나
차라리 자기연민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나을거 같은 건
아직 기운이 차고 젊기 때문일까
어쩌면 서로 측은이 여기는 것이
진짜 측은한 양 부러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연민으로 비롯된 측은함을 치장하고 싶지는 않다
아직은 젊고 기운이 차니 말이다

연민에 대한 글귀를 보고 인스타에 올린 짧은 단상인데 지금은 결이 사뭇 다르다. 연민이 나에게 해석되어지는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연민의 결론은...


애초부터 남편에 대해 연민이라는 걸 품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다. 늙고 병 들어서도 결코 연민의 마음이 생길 거 같진 않다. 친정엄마를 보면 그렇다. 70대 후반의 아빠를 바라보는 눈빛속에 연민은 들어차질 못했다. 결혼 45년이 되어가고 아빠는 늙고 초라해졌지만 말이다. 엄마와 나의 심정에는 애초에 연민이라는 것이 자리하지 않는다. 엄마와 나에게 연민은 그저 책임일 뿐이다. 연민을 스미게 하거나 느끼게 하는 것이 그저 내 책임을 더하는 일 뿐이기에 어차피 내가 짊어져야 할 몫이기에 그 몫을 견디기 위해서는 연민이라는 연약함 보다는 책임이라는 무게감이 더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물질적 토대조차도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친정엄마의 무게감을 생각하면 엄마에게 연민이라는 마음은 그저 사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김훈 작가의 저 말은 실로 그저 문장으로서의 그 이상을 말해준다. 분명 자기삶을 관통한 문장이었으리라.


그렇게 연민이 스치듯 지나고 나니 이제는 이해가 다가온다.

이반 데니소비치,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하긴,이해하려 들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한들 소용이 있겠는가!'

남편이 아야기를 하자며 부른다.이야기라는 것이 본디 서로 오고가는 말 속에 필요하다면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것이고 그 의견을 조율하거나 혹은 서로의 심정을 토로하는 것일터.

허나 우리 부부의 이야기라는 것은 나는 그에게 잔소리뿐이요. 그는 나에게 자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날것의 것들을 투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에 이야기하자는 말에 인상부터 쓰게 된다.


허나 이야기의 필요성이 분명해 보이는 그의 요구에 이야기하는 태도에 대한 부분을 언급후 이야기에 가깝지 않은 서로의 날 것을 나는 최대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 먹히지 않기 위해 이성을 붙잡았고 실체없는 감정의 날 것을 그대로 토로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 후 실체를 눈에 들이미듯 마치 눈에 보이듯 그에 눈을 보며 한마디 한마디 심어준다.

남편의 이야기는 이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에 존재 조차도 이해를 구하거나 허락하지 않기에 그저 그에게 이야기의 용도는 자신의 심경을 투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도 아니면 통보일 뿐인 이야기이고 말이다.

이야기를 듣겠다는 태도였을까? 그도 아니면 그가 하는 이야기에 반박보다는 수긍의 반응 탓이었을까?(수긍을 위한 수긍이 절대 아니다 그와 대화 패턴에 대한 방어법을 나름 터득한 것이다)

꽤 오래 이야기가 오고갔고 2차로 나가서 이야기를 또 하자는 그의 말에 역시나 눈부터 짜부라졌지만 이번 이야기의 목적은 달랐다. 나름 친밀을 위한 시도를 한 것이고 서로 오고간 이야기에 대한 그 나름의 반응이었던 것이다.


책 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딱 그 구절을 보자마자 오늘 남편과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해라는 것은 방어가 아닌 환대이고 수용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의 이야기가 환대이자 수용이 되지 못한 건 서로에 대한 방어만을 일삼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말이다. 한편으로 연민이라는 것이 공존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고 말이다.

소설 속 환경에서는 이해라는 것이 불가하다. 군대와도 같은 수용소에서 이해라는 것은 그저 사치이자 강한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그곳에서 약한자의 가장 거추장스런 연민일 뿐이다. 부부사이는 군대가 아니고 수용소가 아닌 이상 연민을 조금 품어본들 어떠한가 싶은 마음으로 그의 이야기를 한귀로 듣고 흘리며 그에 대한 응원을 조용히 기도로 올린다.

두번째 이야기는 산책을 하며 하자는 남편말에 산책길에 나서고 둘이 나란히 걸으며 남편의 손이 자연스레 내 어깨위에 얹어진다. 평소처럼 바로 손을 뿌리치지만 아이 친구엄마의 그 미소와 자연스런 그의 스킨쉽은 교차된다. 그렇게 아이 친구 엄마의 미소는 사라지게 된다.


조금은 가볍게 남편을 바라보는 것이 연민을 품고 이해를 삼을 수 있는 구실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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