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며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나거나 불편한 경우를 종종 겪게 된다. 어른인 나의 일이 아닌 아이의 일은 우선적으로 감정이 앞서기 마련이고 그와 더불어 사회가 요구하는 혹은 이래야 한다고 배운 사회적 지식이 발동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반응으로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부모의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내 아이들 입장에서는 애석하게도 아이에 대한 감정적 배려보다는 나는 사회가 바라고 통용되는 선에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부모에 속한다.
아파트 복도를 걸을 때에는 이웃 주민에게 민폐가 될수도 있으니 큰소리를 내거나 뛰면 안되고 (유연함이 있는 부모라면 민폐이기도 하지만 그정도는 이해를 베풀 이웃을 배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맞다고 여기며 강조하는 그 무엇은 다른이의 맞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존중을 아쉽게도 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 아이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상황에 다른 아이가 타고 싶어서 기다리는 경우에 내 아이의 놀 권리보다는 다른 아이의 놀 권리만을 존중하며 양보를 말하는 부모에 속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도 자식애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사회에서 제시하는 기준에 부합하기 위한 어른으로서의 대처에 가깝다. 이 역시 유연한 부모였다면 양쪽 아이의 놀 권리를 상기하며 그에 따른 해결책을 제시했을 것이다.
이렇듯 난 언제나 나 아이의 권리나 존중보다는 사회적 지시(?)에 합한 자가 되기를 자처했고 그 외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허용이나 수용이 많은 편이였기에 아이들이 그것에 대한 거부를 이야기하진 않았다. 우리 아이들 역시 부모를 보고 닮았으니 양보와 미덕이 당연하다 여기는 축에 속한다. 특히나 둘째 아이같은 경우는 그 미덕이 지나칠 정도라 버스안에서 사부작 나누는 대화소리에도 쉿 하며 조용하라고 나에게 눈짓을 보내는 아이다. 이 역시 유연함을 가지지 못한 태도이기에 (다른이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된다는 전제는 나도 민폐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내포되어야 한다.)아이에게 상황에 대한 유연함을 설명하려 애쓴다. 남을 위하는 것이 결코 나를 해하거나 나를 없애는 행위가 되면 안되기 때문이다.
제작년인가 큰아이 초5때 있었던 일은 다소 문제가 달랐다. 그 문제에 대한 접근은 윗글에 썼듯이 부모 입장에서 결론을 내었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결론이 전혀 나지 않는 문제였다. 문제의 발단은 등굣길에 자폐 성인아이가 우리 아이를 기다렸다가 인사를 건내는 것, 한번은 아파트 앞에서 우리 아이를 기다리는 모습을 내가 직접 목격하고 그전까지 그 형에게 같이 인사해줘 라며 사회적 약자라 여긴 이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했었는데 막상 집앞에서까지 기다리고 있는 그 형을 보니 부모로서 혼란스러웠다. 사실 아이는 불편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역시나 사회적 도리(?)를 지키느라 억지로 그 형에게 인사를 건내며 그 불편한 순간을 견뎌왔던 것이다. 그것도 모른채 사회적 배려와 당위성으로 아이에게 그 형과의 인사를 당연시 여긴 부모로서의 처우가 스스로 굉장히 불편하게 다가왔다. 내 아이의 불편함은 깡그리 무시하면서 말이다. 그정도의 불편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형이 자신의 루틴에 따라 항상 비슷한 시간에 내 아이에게 인사를 건내는 행동을 이해하는 만큼 그 행동에 대한 불편을 호소하는 내 아이의 마음도 부모로서 인정하고 존중해 줬어야 한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고야 알게 됐다.
그 형이 2년이 지난 최근까지 등굣길에 남자아이들에게 항상 인사를 건냈고 한번은 경찰이 그 형과 함께 그 형 부모님과 통화를 한 뒤 그 형은 다시는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누군가 불편함을 신고라는 행위로 표현을 했고 경찰을 통해 해결이 된 것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부모로서 품게 된 건 당연하다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부터 한편으로는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난 맞서기 보다는 그저 견디는 편을 택했던 것이다. 사회적 배려라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저 견디고 그저 묵인하는 것은 결코 배려가 아니다. 내 아이를 존중하고 정말 그 형을 배려했다면 그 일에 대한 대처를 어른스럽게 해냈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아이를 위한 배려의 차원은 특수교사로 일하는 친한 동생에게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 한 후 대처에 대한 조언을 들은 정도이다. 그 친구말이 어띠됐던 그 자폐 형은 성인 남성이기에 아이가 불편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부분은 수용해줘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러니하게 얼마전부터 교회 초등부 예배에 자폐아이가 들어오면서 이번에는 둘째와 셋째가 불편함을 호소했다. 큰애때 겪은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먼저 그 불편함에 대한 부분을 물어보고 수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것은 교회라는 장소라는 것이 걸린 것이다. 그 친구는 초등 아이들보다 훌쩍 크고 등치가 있는 친구였고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정도의 장애였다. 차후에 그 친구가 고등학생이라는 것과 그 친구 동생이 초등부이기에 같이 초등부로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장애를 떠나 원칙적으로 초등부에 고등부 아이가 있다는 것에 대한 해결을 보면 되겠다며 안일한 태도를 가졌다. 마침 그 친구에 대한 불편함을 호소한 부모가 있어 그 문제는 일단락되었는데 역시나 나는 직접적인 액션을 취하지 못했다.
요즘 관련 이야기가 시끄러운 와중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이기적으로 자기 아이의 안위만을 일삼는 부모도 있지만 나처럼 사회적인 요구에 응하느라 내 아이를 그저 내버려두는 부모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 아이를 위한 부모의 행동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떤 아이던지 존중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 존중을 기본삼아 배려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사회적인 요구는 존중없이 그저 배려만을 떠안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존중이 없기에 배려가 당연시되고 그 배려가 충족되지 못했을시 자기애적인 존중만 일삼느라 문제가 불거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 교육기간의 첫 시작인 유치원 과정부터 존중보다는 예의와 배려를 먼저 습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개인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배려는 기본적으로 습득하게 되어 있다. 배려는 한쪽이 참는 행위가 아닌 기본적인 존중의 행위로서 기꺼이 떠안거나 감수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배려라는 행위가 요구하는 입장에서는 권리가 될 수도 있고 받는 입장에서는 묘한 수치심을 느끼게 할 요소도 다분하다. 배려는 나를 위한 것도 아니고 너를 위한 것도 아닌 모두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원만한 사회적 환경과 사회적 관계를 위해 갖춰줘야 할 존중적 행위일 뿐이다. 배려를 논하기 전에 존중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 존중이 배제된 배려는 사회적 이기를 부추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