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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Nov 02. 2023

진주서평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브레네 브라운  두 번째 시리즈입니다. 제목부터 만만치 않죠?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라니 말이죠. 나를 나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해 보셨나요? 전 단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습니다. 다만 심리를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저에게 적용시킨 말은 '나 자신을 믿으라'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나 자신을 믿지 못했었기 때문일까요? 아마도 제목처럼 나 자신의 편이 되지 못한 채 반대편의 서서 나 스스로의 가장 큰 공격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에서는 브레네 브라운을 상징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부터 떠오르시나요? 전 창피함이 떠오릅니다. 길 가다 걸려 넘어져서 아픈 티도 못 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자신에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수치심일 겁니다. 단순히 길 가다가 넘어진 것이 왜 그렇게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못남이나 부족함이 드러나는 순간에도 전 수치심이 떠오릅니다. 15년이 지난 일인데도 여전히 제 뇌리에 박힌 것은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정확하게 말하면 잘못 알고 있던 영어 단어에 대해 콕 집어서 정정을 해준 사람에 대한 기억입니다. 발야구인지 족구를 하면서 네트(net) 여부를 이야기하는 중에 제가 아마도 메트(mat)라고 했던 듯합니다. 가장 정확한 건 제가 네트를 알지 못했던 것이고 그것을 알려준 분은 별 뜻 없이 정정을 해준 것일 테지만 전 상당히 수치스러웠습니다. 아마도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용한 것이자 그것이 건드려지니 무식함이 탄로 난 듯 창피했을 겁니다. 



이렇듯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 건드려졌을 때 우리는 수치심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특히나 그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 인정하는 경우라면 더 그렇지요. 물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인정하며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을 수 있지만 그 당시 전 그러지 못했답니다. 지금도 여전히 영어는 못하지만 영어를 못하는 것이 혹은 영단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은 없습니다. 왜냐면 저 스스로 저 자신에 대한 위치를 알고 모르는 것에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비슷한 류의 수치심을 종종 경험한 거 같습니다. 알고 있는 척하다 들통나거나 실력이 있는 척하다 실력이 드러나거나 하는 일이 말입니다. 아마도 남에게 지고 싶지 않거나 똑똑해 보이고 싶은 제 안의 욕망이 그런 우를 범하게 했을까요? 아니면 남이 날 깔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는 척으로 자기방어를 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욕망하던 것들의 결핍으로 인해 그것을 이루기 위해 혹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역으로 완벽주의를 심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족하니깐 그 부족을 없애고 싶어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죠. 하지만 채울수록 더 채워야 할 것이 보이고 생기는 건 애초부터 완벽히란 있을 수 없고 그 완벽이 나를 기점으로 한 것이 아닌 타인의 기점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밑 빠진 독이 되는 것입니다.



위에 테라사에 이야기는 저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저 역시 결혼과 육아 후 내가 바라던 이상과 전혀 다른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악다구니를 쓴 순간이 있거든요. 그 대상은 가장 어린 자녀가 되었고 말입니다. 내 현실이 불만족스러울수록 온 신경이 내가 가지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탓을 하느라 그 구실이 되는 것을 참 미워도 했던 거 같습니다. 다행인지 그 모든 화살이 저 자신에게로 행하며 그럴수록 수치심으로 얼룩진 제 마음은 제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바래 마지않는 그 이상적 현실을 그리며 한 번씩 느껴지는 현마감에 좌절을 느끼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비현실에 대한 화풀이를 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그 현실을 그려보고 꿈꾸며 이뤄내기 위해 현실적인 대안을 찾으며 노력이란 것을 하지요. 






이 글에서 보듯이 내가 이루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한 혹은 내 위치를 생각하지 못하고 비현실적으로 그려낸 이상에 대한 수치심을 나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려 내 자긍심을 심는 쪽으로 저는 발전시켰습니다. 나 스스로에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고 싶은 이유가 첫 번째이고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한 첫 발걸음은 내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은 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초라함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갖춰기에 거기에서 오는 만족감으로 수치심을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닌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부족함을 나 스스로 수치심으로 여긴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죠. 


부족한 느낌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의 경험을 남들과 나누는 것이다



제가 제 스스로 수치심을 스스럼없이 들어내게 된 계기는 책을 통해 모임을 하며 저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오픈하기 시작하면서입니다. 진행자로서 먼저 솔직해야 하기도 했지만 자아를 성찰하기 시작하면서는 의도하지 않아도 내가 고민하고 생각하는 바를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면서 저에 대한 수치심을 자연스럽게 노출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내 민낯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과정 속에 동감과 이해를 얻기도 했고 또 솔직함을 통해 덩달아 솔직하게 서로 오픈이 되는 모임이 되었다고 할까요? 한마디로 내 수치심을 이야기해도 무방할 안전함을 갖춘 모임을 만들어 가게 된 것입니다. 






내가 나 스스로 내 편이 되지 못했을 때 나의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진실하게 들어주는 이들을 통해서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맞는 이야기일듯합니다. 내가 용기를 내서 내 수치심을 들어내어도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왜곡하거나 판단 내지 평가를 내린다면 되려 더 수치스러워 자신을 숨겨버리게 될 수도 있었을 텐테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의 이야기가 되어주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이해와 공감을 일삼는 모나리자 멤버들에게 정말 무한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내가 내 편이 되지 못할 때, 혹은 내 수치심에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자꾸만 갖으려 할 때 진실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집단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 사람은 자신의 수치심에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자비의 가장 강력한 도구인 공감은
 타인에게 진정성 있게 배려하는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감정적 기술이다 
공감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는 능력 
즉 타인이 경험한 것을 이해하고 숙고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공감의 전제조건은 바로 자비다



자신의 편이 되지 못하고 자꾸만 비수를 스스로에게 꽂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자비입니다. 자신에게 먼저 베풀지 못한 자비로운 집단이나 타인을 통해 이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감이라는 것은 수치로 얼룩진 마음에 자비를 심게 하며 자신에게로 향하는 화살을 스스로 거두어 내게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로 화살을 쏘지 않아야 타인에게도 그 화살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치심은 숨기고 가려질수록 커집니다. 수치심을 가리기 위함이 되려 수치심을 키우게 하는 양분이 되는 것이죠. 오히려 수치심을 들어내므로 다른 이의 수치심이 건드려져 '나만 그런 게 아니네?'라는 동질감을 얻게 된다면 한결 수치심의 무게가 가벼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수치심으로 무거워진 마음의 돌덩이를 서로 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게감이 줄어든 것이죠.


우리가 무엇에 취약한지 알면 수치심을 알아차리는 데  도움이 된다



브레네 브라운 시리즈 첫 번째에서 취약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진주서평 마음가면 참고해 주세요. 


https://blog.naver.com/cocome80/223249280541


내가 취약하다 생각하는 것이 곧 내 수치심이 됩니다. 저는 앞전에 영어에 대한 이야기를 했듯이 무언가 알지 못하거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데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 한마디로 지식에 대한 부분을 취약하다고 느끼기에 그 부분이 건드려지면 수치심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내가 갖추고 싶어 하는 비현실적 이상에 대한 부분에 대한 것이 드러나거나 비춰지는 것에도 수치심이 올라옵니다. 이 부분은 순전히 제 기준점이 아닌 세상의 기준이나 타인의 기준점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부족하다 여기며 느끼게 되는 수치심이랍니다. 






나 스스로 취약한 부분에 대한 노출이 수치심으로 불거지는 건 순전히 내 생각과 판단입니다. 그리고 남들이 그렇게 볼 거라는 추측과 남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지라는 염려로 그 수치심을 더 자극하게 되고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사고방식에도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생각하고 판단한 것이지 진짜 남이 어떤지는 모를 일이라는 걸 왜 내 사고방식에 갇혀서만 판단했을까요? 그리고 사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합니까?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되는 걸 그러지 못하고 그 사실이 사실이 아닌 듯 꾸매내고 싶으니 자꾸만 취약함은 많아지고 그로 인한 수치심으로 인해 심신이 불안정하게 되는데 말입니다.


수치심과 관련한 변화를 이루려면 이해가 필수조건이다
<나는 ㅡㅡㅡㅡ이기를 원한다>
<나는 ㅡㅡㅡㅡ이기를 원치 않는다>




내가 나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기고 모자라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채우기 이전에 그것을 숨기는 것에 급급합니다. 그럴수록 자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숨기고 은폐하면 모르거라 생각하고 말입니다. 껍데기만 가지고 자신을 살아간다는 건 평생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 채 거짓된 자아로 자신의 생을 망쳐버립니다.




취약성과 수치심으로 인해 인생이 감춰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반드시 이뤄져야만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이나 모자람을 숨길 것이 아닌 확인사살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읽어내어 현실적인 노력으로 이어지게 해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으로 태어나 자신으로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스스로 씌운 굴레나 자신만의 기준이 아닌 그 외 기준들에 끼워 맞추며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채우려고 해도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애쓰고 노력할수록 억울해지고 분노만 차오를 뿐입니다. 


저 역시 자신으로 살기 위한 자아실현을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하며 이뤄가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사람이기에 내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나 스스로  만든 수치로 인해 자꾸만 오기가 틈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 오기란 것이 나를 좀 먹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그 오기를 덜어내려고 스스로 마인드컨트롤을 합니다. 오기가 생기면 자꾸만 탓을 하고 싶고 원망의 대상을 찾게 되니 말입니다. 그럴수록 현실을 바라보고 그 현실 안의 거하려고 하며 그 현실 속의 자아를 분명하게 하므로 비현실적인 굴레에서 돌려놓으려 의식합니다.





다양한 원인이 일으킨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분노가 나타나는 것





수치심은 없애거나 느끼지 않으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수치심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파악하고 그 수치심을 인식하며 그 수치심을 인정하고 밖으로 끄집어내어 현실적인 대안을 적용하므로 다스려야 할 감정입니다. 수치심을 느끼는 부분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수치심으로 인해 파생되는 세부적인 감정 역시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는 수치심을 느낄 때 얼굴이 실제로 달아오르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굉장히 난처함을 느끼기도 하며 세상 제일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순간에 가장 싫은 건 자기 자신이 되지 않을까요? 자신의 편이 되지 못하니 말입니다. 아니면 오히려 그 수치심을 자극한 대상에 대한 불만이나 원망으로 발전될 수도 있고 말입니다. 내 편도 될 수 없고 남의 편도 될 수 없는 공중에 붕 뜬 수치심이 가장 위험하지 않나 싶습니다. 


달래지지 못하고 살펴지지 못한 감정의 날 것은 결코 연기처럼 흩어지지 않습니다. 살펴지지 못한 감정은 언제든 나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 공격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살피며 내 편이 되어주는 것이 나를 위하는 가장 지름길입니다. 


수치심은 내가 말 들어낸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비현실적인 환상에 젖어 나를 외롭게 하지 마시고 현실 속에 거하는 나를 오롯이 바라보면 가만 스스로를 안아줄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진주서평을 통해 가져보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진주서평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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