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철학이 가장 필요한 때가 마흔 이후가 아닌가 싶습니다. 철학적인 사고를 태생부터 지니고 있었고 철학적인 성찰을 20대부터 책을 통해 머리로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머리로 아는 철학과 삶으로 깨우친 철학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무엇이든 가능할 거 같고 패기 가득 찼던 여전히 내가 노력하는 대로 내 의지대로 내 세상이 꾸려질 거라 예상했던 30대가 지나고 40대에 들어서니 현실이라는 벽ㅇ 내 세상을 나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존심은 한순간에 바스락거리게 됩니다. 의지보다 세상이 더 세단 걸 알았다고 할까요? 그때부터 우리는 철학에 더 가까워집니다. 인생이 비로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신기루 같다는 것을 현실이라는 문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죠.
철학은 어쩌면 삶에 바스러지는 인간을 살려내기 위한 도구로 그렇게 오랜 시간 이야기되어 오지 않나 싶습니다. 철학은 가장 오래된 학문이자 지금까지도 회자되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서점에 가보면 40대 50대에 철학을 논하는 책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현타온 인생에 가장 필요한 것이 철학이라는 반증이겠지요? 공자는 마흔이라는 불혹에는 미혹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오히려 요즘 40대는 미혹되는 세상사에 정신을 못 차리는 나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에 너무 미혹이 되는 것이 현재에 자리 잡지 못하는 구시렁거리는 들뜬 마음이 미래에 발목이 잡혀 있거나 투명했던 과거를 지나 불투명하기 그지없는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니 앞이 깜깜하여 과거에 엮인 우리는 심히 괴로운 현재를 살고 있지 않나요?
저는 과거의 불투명성을 미래의 투명성으로 자아내고자 하는 욕망에 현재를 저당잡혀 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지방에 사는 사람이 서울(미래)에 가야 지 하는 마음으로 돈을 모으는데 돈만 모을 뿐 구체적으로 서울 어디를 가서 관광(구체적인 미래 제시)을 할 것인지는 생각지도 않는 것입니다. 서울을 가고 싶은 이유는 서울에 가보지 못한 아쉬움으로 지방살이에 대한 설움(과거)이 폭발을 했기 때문이고요.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밝은 미래를 원하지만 그 밝은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나 목표 없이 막연히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싶고 그로 인해 욕망하는 것들을 채우고 싶다는 막연한 꿈만 꾸었지 구체적으로 그 꿈을 이르게 하는 단계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40대 초반을 두 달 안되게 남겨놓은 지금은 매일 일상의 성실함이 미래를 장식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지금 현재 내가 가꿔나가는 하루라는 성실함이 미래에 바탕이라는 것을 말이죠. 현재를 망각하는 미래는 결코 현재와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를 직시하는 미래만이 미래를 마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밝은 미래를 원하시나요? 지금 현재의 나를 보시면 됩니다. 그것이 곧 미래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세월은 우리를 시기하며 흘러만 가네
오늘을 잡아라, 미래는 믿지 말고
가수 김연자 님의 노래로 유명한 '아모르파티'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1882년에 출간한 '즐거운 학문'에서 라틴어 문구로 '아모르파티'가 처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아모르는 사랑이고 파티는 라틴어로 운명이란 의미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사랑하라 운명을 일까요?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을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의 것으로 인생을 활개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야지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 역시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건 당연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위하기보다는 자신을 탓하기 일쑤고 자신의 부족함에 자신의 상실에만 매달리어 상념에 사로잡히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기도 하니깐 말입니다. 운명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열린다고 했던가요? 운명이라는 것이 그 운명의 대상자로 말미암아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니 운명을 사랑하는 이에게 당연히 그 운명이 자신을 맡기는 건 진리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시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시나요? 그 증거가 오늘 보낸 하루에 있습니다. 운명을 사랑하는 자는 일상이 충만할 것이고 운명을 논하는 자는 일상이 수행일 듯합니다. 쓰고 보니 저는 양쪽 다 해당입니다. 운명을 논하는 일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현실을 살아내지 못했고 그 해답으로 일상의 충만을 이루어 내지만 아모르파티에서 말하는 운명을 사랑하기에 사랑이 조금 부족하니깐요.
놀라움이라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놀라움이라는 정의를 다각도로 한다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행복에는 감탄이라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감탄이라는 것이 부정보다는 긍정의 의미에 가깝고 감탄이라는 것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요소에 의한 작용이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요소에서 작용하는 감정이니 말입니다. 행운이나 축복이 부과된 감정이라고 할까요?
반면 놀라움이라는 것은 부정과 긍정 둘 다의 요소를 내포하긴 하지만 놀라움이라는 것 자체는 내가 전혀 알지 못했거나 의식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나만의 감탄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놀라움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열린 자세이자 수용의 마음이고 이해를 하겠다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세상사에 전혀 놀랄 일이 없거나 감탄할 일이 없는 사람의 인생은 무미건조이자 메마른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을 숨만 쉬는 것이 아닌 마음의 숨을 통해 사람은 놀라기도 하고 경탄에 빠지기도 하니깐요. 철학은 이성적 사고의 작용이지만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은 이성적 사고는 그저 철학적 지식으로 그칠 뿐입니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한 분야에서 실상은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당혹스러운 경험,
이런 놀라움이 철학의 시작점입니다
당연한 것이 더 이상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철학적인 놀라움이 시작됩니다
놀라움은 늘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놀라움을 느끼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생생히 살아 있게 하는 일,
끊임없이 자신을 개방하고
새로움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이어 가는 길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모두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사람은 그제야 자신이 알고 있던 것에 반하던 깨닫지 못한 것을 알려고 하는 힘을 가기던지 아니면 자신의 무지를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것을 증명하러 더 매몰차게 살아가던지 아니면 다 놓아버리던지로 나뉠 듯합니다.
모두 허상이라고 느끼게 되는 건 삶이 우리에게 건네는 첫 축복의 관문이 아닐까요? 얻어낸 축복이 아닌 얻어질 축복을 위해서 삶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아닐까요? 철학적 사유로 비롯된 삶의 인정과 삶의 다각적 지혜는 결코 매력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가장 불행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행복의 사유이라고 할까요?
오늘 메마른 우리 가슴을 적셔줄 놀라움을 한번 경험해 보는 건 어떨까요? 어제 수업을 하는데 아이들이 내일 첫눈이 온다고 했다며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더라고요. 너희도 첫눈을 기대하니?라고 물으니 당연하죠! 첫눈이잖아요!라고 합니다. 첫눈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설렘이자 그것이 실현될 때의 놀라움은 그 설렘을 기대한 자의 몫이겠지요. 아쉽게도 오늘 첫눈이 올 거 같지는 않지만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어도 상관없고 겨우내 첫눈은 꼭 올 것이니 그 첫눈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겨울을 지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아모르파티'한순간이 아닐까요?
겨울에 오는 첫눈의 설렘처럼 매일 하루의 설렘이 우리 마음에 지속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놀라움이라는 연속으로 생동감 넘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아침 제가 놀란 건 분명 7시에 눈 떠서 일어나야지 했는데 어느새 7시 20분이라 매우 놀랐답니다. 와 눈 한번 감았다 뜨니 20분이 지나있네?라며 말입니다. 예전 같으면 지나있는 20분에 대한 아쉬움으로 짜증부터 냈을 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온 삶을 바쳐서 배워야 한다 -로마 철학자 루키우스 세네카-
배움이 끝이 없다는 것은 필요에 의한 배움이 아닌 삶을 위한 배움을 말합니다. 학령기에 배움은 세상에 나갈 채비를 준비하는 것이고 비로소 세상에 내던졌을 때는 내 온 삶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물음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을 찾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듣고 보고 그것을 내 것으로 체득하는 것입니다. 학령기에 베운 답이 있는 질문이 아닌 나만의 답을 찾아 나만의 여정을 살아내는 것이 곧 철학적 사유의 삶이자 오롯한 내 일생인 것입니다.
답이 있는 질문에 너무 익숙한 우리이기에 저마다의 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가끔은 이게 답이 맞나? 싶기도 하지만 그 답에 대한 책임을 순전히 자신이 질 수 있고 지고자 하는 의지로 살아간다면 틀린 답도 맞게 되는 역사가 이뤄지지 않을까요?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가는 건 답이기에 가는 것이 아닌 답일까 싶은 내 의지에 대한 부족함을 표명하는 것이니깐요. 언제든 마이 웨이를 고수할 수 있는 내 답은 내가 찾겠다 와 내 답을 정답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의 작용입니다.
우리의 모든 배움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만의 답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배움은 우리 삶에 대한 성찰로 돌아와야 합니다
삶을 향하지 않는 공부는 공부가 아닙니다
철학이 나에게 당도하는 것은 더 이상 헛것에 사로잡혀 저당잡힌 삶을 살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신호를 잡지 못하는 것은 태어난 김에 사는 것이고 사실 가끔은 이렇게 태어난 김에 살아가는 사람을 보며 부럽기도 합니다. 최소한 자유함을 스스로 허용하는 것이니깐요. 그 자유함을 위한 누군가나 환경의 희생이 있을지언정 말입니다. 신호가 거슬리고 불편한 사람은 그 신호에 따라 살아야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쪽에 속하기에 그 신호를 전혀 듣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그 신호에 응답하는 건 한마디로 내 인생을 온전히 내 삶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와 책임의 결심이기에 나로 온전히 살아내는 것에 대한 만족함을 얻는 것으로 저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용기와 자유
그리고 책임을 강조합니다
저는 샤르트르의 실존주의가 결이 맞습니다. 저는 종교도 그렇고 추구하는 바가 결국엔 자기 안에서 비롯되고 자기로 인해 완성된다 여기는 주의입니다. 예전 종교적 이야기를 나누며 신앙 가장 근본은 개인의 문제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의 바탕에서 말입니다. 교회 내에서 봉사를 하며 그로 인해 불거지는 트러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했던 이야기인데 교회에서 봉사를 하거나 무언가 섬기는 것에 기본은 개인의 신앙 바탕입니다. 삶도 그렇다고 봅니다. 개인의 삶에 대한 주체성이 기본 바탕이 되어야 그 위에 안전한 터전을 세워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대어가는 삶인지 스스로 기댈 구석을 만들어 내는 삶인지 자기 자신과의 합의를 보면 되지 않을까요?
살아낸 이력이 오래 살았다는 나이만 증명이 되는 건 운명이 우리에게 준 선물에 대한 감사를 알지 못하지 때문일까요? 운명 입장에서 나이만 먹는 증거만 남는다면 아쉬울 듯합니다. 운명은 그것을 사랑하는 이에게 열리고 비로소 아모르파티를 이루어내는 것이죠. 운명을 사랑하시나요? 당신의 오늘 하루가 아모르파티하시길 바라봅니다. 저는 첫눈을 기대하는 아이들의 바람이 이뤄지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