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서평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by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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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시인의 산문을 가져왔습니다. 제목에서부터 무언가 느껴지시나요? 사실 읽어볼까 하다 제목 때문에 오히려 꺼린 책입니다만 책표지가 또 궁금해서 읽게 된 책이기도 합니다. 남녀의 얼굴에 왜 표정을 지웠을까요? 제목처럼 우는 얼굴이었다만 오히려 반감을 샀을까요? 여자가 노를 젓고 남자는 하모니카를 부르는 모양새가 언뜻 이상하게도 여겨지지만 아마도 슬픔의 그늘이 남자에게 더 드리워진 때문이 아닌가 혼자 해석해 봅니다.



우시나요? 우는 일이 언제 있으셨나요? 전 원래 잘 울지 않는 편이긴 한데 나이가 들수록 더 안 울게 되는 거 같아요. 울음을 삼키는 적은 있지만요. 최근에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에 다녀오며 눈물을 한번 삼키고 그 이후 그 친구를 만나 일상을 나누며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또 울음을 삼켰습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일까요?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울고 싶을 때 눈물을 쏟아낼 수 있는 사람 가슴에는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차라리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고 참아왔던 설움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저는 주로 기도할 때 눈물을 흘리는 편인데 하나님께 고하면서 하나님 때문에 운다기 보다 그냥 내 처지가 처량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그냥 한숨처럼 눈에서 물을 빼냅니다. 눈물의 한숨이 쏟아지고 나면 한숨이 좀 가라앉는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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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건 살아갈수록 익숙하고 수월한 것이 아닌 살아낼수록 낯설고 삶이 뭔지 알겠기에 마주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삶의 한 켠으로 눈치를 보게 되는 거 같습니다. 위풍당당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에 대한 자세가 쭈구리 같진 않았는데 살아가는 연수를 더해갈수록 삶 앞에 쭈구리가 되가며 눈치를 보게 되는 입장이 되더라고요. 저만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야 위안이라도 되지요.



살아갈수록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는 여러모로 마음의 안정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만 그런지 아닌지 자꾸 내 서사를 읽어 내려 하고 읽어주고 다른 이에게 들려주기도 해야 합니다. 작게만 여겨지는 삶은 이야기될수록 삶으로서의 가치를 지닙니다. 내가 살아낸 삶에 대한 서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삶에 대한 주체성이자 나로 살아가는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니깐요. 나로 살아가는 용기를 꺼내어 말할 수 없는 건 온전히 나로 살지 못함이기도 합니다.


살수록 나를 데리고 산다는 일은 나를 살피는 것이고 나를 위하는 것이고 나를 다독여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를 외면하고 다그치고 궁지에만 몰다 보면 어느새 나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죠. '운다고 뭐가 달라지나, 나만 불쌍하고 처량하지.' 울음으로서 마침내 드러나게 되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눈물을 쏟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내가 그런 사람인 것이 인정이 되는 거 같으니깐요.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전 눈물을 쏟기보다는 참았나 봅니다. 다만 내 전부를 들어내어도 아무렇지 않을 거 같은 신에게만 제 눈물을 보이는 거죠.


울 수 있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가만 내버려 둘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울 자격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울 자격을 갖추고 태어납니다. 세상에 첫 관문에 울음부터 터뜨리니 말이지요.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울 자격이 충분한 우리는 울고 싶을 때 그냥 울면 됩니다. 엉엉엉 이렇게요.



삶의 낯섬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겪고 또 겪어도 말이다 나이가 들고나서 더 이상 탓할 무엇도
보탤 그 무엇에 대한 기대마저 자리 잡지 못할 때
그때 비로소 삶이 익숙해지는 걸까
삶이 익숙해지는 순간 죽음이라는 낯섬을 마주하게 되겠지
비로소 삶이 낯설지 않는 순간은
죽음이 당도했을 때

<진주>



가난 자체보다 가난에서 멀어지려는 욕망이
삶을 언제나 낯설게 한다는 것




삶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를 위한 다른 삶이 준비된 양 그 삶을 동경해 마지않는다면 자신에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인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날 위해 준비된 판타지가 있다는 생각이 지난한 삶을 견디게 해주기도 하지만 환상 속에 젖어 살아간다는 것은 병적인 자기 기만에 불과합니다.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는 삶에서 어떠한 구원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기만한 자신을 깨닫지 못하므로 오만한 세상을 원망하는 구실을 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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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울음을 불러내는 자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삶은 더 이상 낯섬으로만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꺼이 나의 울음에 응답하는 신호로써 눈물 한 바가지 쏟아 낸다면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에서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닌 쉼표를 찍고 그 이후의 문장을 나만의 언어로 장식하게 되는 것이죠. 나를 기만한 나쁨으로써의 삶이 아닌 자기수용을 통해 좋음으로써의 삶으로 방향이 전환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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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삶이 어떤지 어떤 길인지 알려주고 싶지 않을까요? 우리 부모네가 자녀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퍼붓는 건 이미 걸어온 길에서 얻은 해안을 자녀에 알려주고 싶고 부모네가 돌고 돌았던 인생의 시간에 대해 자녀만큼은 과오를 범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일 겁니다.


사실 저자의 아버지의 말은 자녀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이해가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합니다. 살아갈수록 나이에 따른 역할과 위치에 거할수록 책임져야 할 것이 많고 짊어져야 할 짐이 많아지긴 하지만 더 이상 혼자만 이고지는 삶이 아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나누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가난하기만 저자의 아버지는 알지 못했던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게 되는 것은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원수 같은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 원수 같은 마음에 미워하는 힘으로 살아가게도 되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혼자 외로움에 사무쳐서 시들어가지 미워하며 탓하는 것으로 사람은 시들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 힘으로 앙다물고 미워하는 일을 그치지 않도록 힘을 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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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만 왜 이럴까 싶으면 눈물이 더 짜고 시리게 느껴집니다. 삶의 찌꺼기 같은 나쁨들이 눈물에 응축이 되어서일까요? 그 짜고 시린 눈물에 또 더 눈물이 나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개가 다가와 눈물을 핥아 줍니다. 혼자가 아니었나요? 내 눈물 알아줄 살아있는 누군가는 개가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심지어 들려오는 소리가 되었든 결국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울어서 그 눈물 알아줄 누군가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 알아줌이 희망의 한줄기 빛이 된다는 건 울어봐야지만 알 수 있습니다. 울고 싶으세요? 맘껏 우세요. 울어서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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