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작가님은 시인이십니다. 저는 박연준 작가님을 <소란>이라는 산문으로 처음 접했지만요. 정작 시는 읽어본 적은 없고 박연준 작가님의 산문은 찾아서 꼭 보고 있습니다. <고요한 포옹>은 제목과 표지마저 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시적 감각이 살아있는 산문은 읽고 나면 긴 시를 읽은 듯한 기분에 빠지고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뻔한 이야기지만 시적인 산문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은유적 사색에 잠기게도 하니 일상의 순간이 시적인 유희를 맛볼 수 있다고 할까요?
책을 마무리하는 일은 꽃밭에 물을 주듯
기르던 단어 곁을 그 장소를 떠나는 일이다
작가라면 글을 마무리 짓고 책을 내는 것이 자식을 기르는 마음과도 같을듯합니다. 어린 시절의 아이를 장성하도록 길러 독립하게 만드는 부모의 노릇이 끝나고 나면 그 자녀는 자녀 나름의 삶을 일구어 가는 것이죠. 책을 낸다는 것 역시 책을 내고 난 이후의 일은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집니다.
글을 잘 길러낸 작가의 마음이 잘 읽힌 독자로 말미암아 그 길러냄이 빛을 발할 수 있다면 최고의 영광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으로 길러내어 보낸 글들에 대한 아쉬움도 없지 않을듯합니다. 더 적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거릴 것 없는 글을 지어낸다는 것은 쓰고 또 쓰는 일을 반복한다고 해도 항상 아쉬움이 남지 않을까요? 그래서 되려 작가의 말처럼 그 장소를 떠나버리는 것을 선택하는지도 모릅니다. 아쉬움에 자꾸만 뒤돌아본다면 미련이 붙어버리니 말입니다. 길러낸 자식이든 지어낸 글이든 뒤돌아보지 않고 보내줘야 할 때를 아는 것이 그다음의 길러낼 것에 대한 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되고 싶은 나와 되기 쉬운 나 사이에서 괴로워하다
금을 간직한 내가 되는 이야기
지인이 MBTI 검사를 할 때마다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되고 싶은 나와 돼야 할 거 같은 나, 그리고 실제의 나 사이에서 매번 방황하는 것이 아닐까 물었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나보다는 되고 싶은 나와 돼야 할 거 같은 나 사이에서 정작 진짜 나를 잃은 채로 살아가는 날이 숱합니다. 그렇게 돼야 하는 나는 되지 못한 나로서 괴롭고 돼야 할 거 같은 나는 나로서 온전히 살고자 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어 버립니다. 나인데 나에게 걷어차이는 꼴이 된다고 할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내면의 상처는 되고 싶은 나와 그러지 못한 나 사이의 상충된 것에 대한 괴리로 인한 부분이 많습니다. 저 역시 되고 싶은 나와 나로서 나, 그리고 돼야 할 거 같은 혹은 돼야 한다고 여기는 나 사이에서 자아가 분리되는 듯한 기분에 스스로 혼란스러웠던 순간이 있습니다. 특히나 사회적으로 지워진 역할에 대한 의무나 책임에 대한 것이 덧씌워질 때 나로서 온전하고 싶은 자아는 가장 강한 충동질을 불러내고 혼연일치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마음의 혼란이나 번민으로 인해 나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선택하는 것이 당장은 감수해야 할 불편함을 주지만 끝내는 나로서 온전해지는데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나로서 온전히 나 자신을 살피며 나를 잘 단장하고 계시나요? 혹은 돼야 하는 나를 만들기 위해 애쓰시나요? 돼야 하는 나 때문에 괴로우신가요?
자신을 내버려 두고 돼야 하는 나를 찾고 되고 싶은 나를 찾는 것은 나를 두고도 나를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나로 돌아서게끔 자꾸만 내 자아는 나에게 끊임없이 노크를 하는데 그 노크에 응답해 줄 나 자신은 다른 곳을 바라보며 그곳의 문이 열리길 기다립니다. 자아의 문은 자기 스스로만 열 수 있습니다. 타인이 열어주거나 열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로 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나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가장 큰 죄악이 아닐까요? 나의 몸을 입고 다른이로서 살아가려고 하니 말입니다. 나로서 온전한 나를 입기 위해서는 자아를 마주하고 나와 포개어지는 작업을 끊임없이 이루어 내야 합니다.
온전히 포개져 스스로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 문장에 대한 답은 표지의 그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요한 포옹은 자기 자신과의 마주함이자 자기 자신과 포개어지는 승화입니다. 자기 자신과 끌어안는 것은 받아드림과 용서의 시그널입니다. 인정하지 못하고 탓하기만 했던 자신의 부족함이나 모자람을 충분히 떠안고 가겠다는 인생의 재전환점이 되는 것이 자신과의 포개어짐입니다. 자신과 포개어질수록 자신은 자신으로서 온전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포개어지는 용기를 낸 자는 타인을 충분히 끌어안을 에너지도 갖게 됩니다.
글을 쓰는 작가의 산문이니 글을 쓰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당연합니다. 글을 짓고 글을 문장이라는 공기에 담아 여러 가지 찬과 어루어지게 나오는 것이 책일진대 우리가 매일 먹는 식사에 공이 들어가고 끼니만 생각해도 뭘 먹어야 하나 뭘 만들어야 하나 무슨 반찬을 해야 하나 매 끼니마다 고심하는 우리네 엄마들이 곧 작가의 마음이 아닐까요?
저는 서평을 주로 쓰고 일상 에세이를 소재가 떠오를 때 쓰고 있는데 서평은 차려진 밥상에 제 몫을 얹는 꼴이기에 찬을 차리는 공은 들지 않습니다. 다만 그 찬에 더해질 허기짐을 스스로 떠안고 그 허기에 따른 진주서평이라는 글로 채우는 것이죠.
많은 작가의 책을 읽으며 문체라는 것이 작가의 개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만큼 작가마다 개성이 다르고 특히나 배우고 싶고 따라 하고 싶은 문체를 흠모하기도 합니다.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진주서평을 쓰고 올리는 것도 제 문체를 발색하기 위한 작업 중 하나입니다. 가끔은 뻔한 저만의 문체에 머리를 잡아뜯는 괴로움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내려가는 것이 개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즐겁게 오늘도 진주서평을 써 내려갑니다.
흠모하는 대상이 있으신가요? 저는 조금 전에 카톡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저는 저 자신을 신봉해요 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떤 이를 신봉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닮고자 함이고 그 사람 마음에 들고자 함일 텐데 저는 저 자신을 신봉하기에 저 스스로 자신이 흠모할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일의 열정을 불태웁니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부끄러운 것을 행하지 않고 나 스스로 떳떳하기 위해 나를 항상 살피고 다스립니다. 그래서일까요? 쉬어야 할 타이밍은 있어도 번아웃으로 가지는 가지 않습니다. 삶이 의무인지 삶이 과정인지는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인지 자신을 이용해서 살아가는지에 따라 다를듯합니다. 자신을 데리고 잘 살아내는 일은 자신을 흠모의 대상으로 우선 삼아야 합니다.
흠모:기쁜 마음으로 공경하며 사모함
불안은 어른을 공부하게 한다는 작가의 말은 어른은 불안을 피하지 않고 배움의 기회로 삼는다는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른이면서도 불안에 시달려 자기가 고수하는 안전지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가 넘어야 할 허들을 넘지 못하는 것은 심리적 어른으로서 자신을 자꾸만 유보시키는 행위입니다. 저 역시 나이가 먹도록 아이 같은 심정으로 불안에 시달리며 그 불안의 허들을 넘어서기보다는 그 불안을 차라리 견디는 것이 더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마침 제선에서 해결이 되지 않은 일이 생겨버려 덜컥 불안이 당도했지만 설령 문제가 내 뜻대로 해결이 되지 않다 해도 또 다른 길이 열리거나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머리로 배워서 아는 걸 제 마음에 읽히니 불안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고 불안이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해줄 수 있구나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불안이라는 공부가 점점 어른으로 저를 성장시키는 것이겠죠?
불안이라는 것이 내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기에 더 아쉽고 애타고 갈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인생이라는 신기루는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애만 타는 것이지 결코 애를 쓴다고 해서 손에 쉽게 쥐어지는 거 같진 않습니다. 스스로 애달은 마음만 고달파지는 것이죠. 그 애달음은 정작 자신의 안위나 자신의 완벽에 기인한다는 것을 안다면 조금은 덜 애달파지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애달음으로 나를 들볶지 않기 위해 오늘의 해결되지 않을 일에 대한 생각을 잠재우려 엄한 일을 하기도 했답니다. 우리가 생각을 안 하려고 하면 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기 마련이지 애달픈 자신을 위로하는 차원에서라도 스스로의 불안에서 구원을 시켜줄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어른다운 처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할까 애걸복걸 마음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라는 것을 간절하게 마음속으로 읊조리는 것이 바라는 것에 다가가는 일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될까 조바심보다는 되고 싶다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실어 제 마음에 담아봅니다.
뱃속에 고아원을 들인 것처럼이라니, 시인이 아니고는 이런 표현이 가당키나 할까요? 우리는 내면의 허기짐을 이고 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뱃속의 허기짐은 음식물로 채울 수 있지만 내면의 허기짐은 결코 음식물을 통해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내면의 굶주림을 좋은 책과 좋은 시를 통해 소화할 수만 있다면 설령 배설물로 나올지언정 그 배설물마저 쓸모가 있는 효용의 가치로 변모하지 않을까요?
아직은 시의 깊이를 모릅니다. 그저 시를 읽고 좋다 정도만 느낄 뿐이지만 이렇게 시인이 쓴 산문을 읽으며 시를 읽은 양 시에 젖어들기도 하며 어쭙잖게 글을 써 내려가며 시적 은유를 흉내 내어 보기도 합니다. 시인과 포개어지는 경험이라고 할까요? 메마른 마음에 시처럼 흩뿌려질 문장이 여러분을 고요하게 안아주길 기대하며 진주서평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