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사춘기에 들어서며 가장 큰 정신적 타격을 받는 존재는 부모가 아닐까 싶다.
부모 키만큼 자란 아이들은 어느새 같은 위치에서 부모를 바라보며 판단이 되어 버린다.
한때는 우주 전부였던 부모가 우주가 아닐수도 있다는 신비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쉽게도 아이들보다 철이 늦게 드는 아이들 아빠는 아이들에게 우주를 선사하지 못했다.
오히려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아웅다웅하는 형제같은 존재라고 할까?
가장으로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일 외에는 딱히 가장으로서의 무게감은 없는 편이다.
일주일에 한번 보는 아빠의 존재감이 당연할 결과일수도 있으나 존재의 무게감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이니 그런 무게감을 체감하기 어려운 남편의 성정은 아빠로서 이미 예고된 것이다.
중1이 되며 사춘기스런 뉘앙스를 몸과 마음으로 표현하는 딸이 "아빠랑 대화하면 불편해."라는 말을 시작으로 오늘 막내는 "아빠랑 있으면 그냥 불편해서 자꾸 엄마를 찾게 돼."한다.
아니나다를까, 간만에 휴일에 막내와 남편이 영화 나들이를 계획하고 그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려 따라나섰는데 영화관에서부터 둘이 이미 티격태격이다.
본인은 안 먹겠다더니 아이 음료와 팝콘을 받자마자 뺐어먹어버린다. '너는 어차피 다 못 먹는다는'자기만의 판단을 구실 삼아서 말이다.
매번 똑같은 패턴을 보이는 아빠에 대해 아이는 방어책으로 막아나선다.
아이들이 크고 나서는 아이들에게 이해하라 했던 편인데 아이들이 클수록 이해의 문제가 아닌 대응의 문제로 접근해야 함을 깨닫는다.
부모는 아이를 참아주는 존재이지 부모가 아이에게 그 참는 일을 맡겨서는 안된다는 것이 오늘 문득 떠오른 결론이다.
남편에게 왜 아이들에게 불편함을 떠넘기게 하느냐며 잔소리를 했다. 어른으로 부모로써 참고 넘길 몫을 왜 아이들이 떠안게 만드냐는 것이다.
중1 딸이 남편과의 대화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도 상통한다. 자기가 듣고 싶고 궁금한 것만 묻지 상대방 이야기를 듣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모든 질문과 답이 결국 답정러인 남편, 그리고 행동까지도 말이다.
남편과 함께 있는 공간은 저절로 불편한 공기가 떠오른다. 그 불편함은 자기 자신이 아닌 본인만 뺀 나머지에게 전가되고 말이다.
살아갈수록 바뀌기 쉽지 않고 바뀔수도 없음을 알기에 이해가 아닌 대응으로서 아빠를 대해야 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서로 이해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관계는 가족이라도 대응이 절대적이다. 그 관계로 인해서 상처를 받지 않기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