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새로운 정의
요즘 행복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확립하고 있다. 내외향성을 공부하면서 주관적 행복에 대한 해석이 사뭇 다른 결로 다가온다. 나에게 있어 행복은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격이었다. 내향성이 강한 성격 탓에 행복보다는 불행 혹은 부정적 요소에 마음이 흔들리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걸 책을 통해 알았고 실제로 정말 그렇다.
전형적인 내향성이라고 하기에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고 말하는 걸 즐겨한다. 그러니 자연스레 말하는 자리에 자주 서게 된다 . 이건 전공이 음악인 탓에 무대에 자주 선 경험때문에 남 앞에 서는게 크게 어렵진 않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난 내향보다는 외향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그러다 사춘기라고 하기엔 약하고 아니라고 하기엔 모호한 중학교 입학전후로 급격히 남의 눈치를 보는 내향성이 짙어지게 됐다. 그러면서 혼자 굴 파는 일과 한몸이 되었고 진짜 친한 사람 아니고는 불편한, 아웃사이더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인생의 방향이 행복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한 거다.
그렇게 20대 초반까지 어둠의 굴 속에 칩거하며 그늘지게 살아가다, 20대 후반 나의 잠재력을 알아봐 주는 스승이 생기며 난 다시 외향성을 되찾아 사람들 속에 섞이게 되었다. 난 10년 주기로 전성기를 맞이하는 편인데 27살 그 시절이 그랬고 몇년 전 지난 37살이 그랬다. 지금 42살이니 5년 후면 또 전성기를 맞이하려나?
전성기 전후로 맛 본 행복감은 나에게 성취이자 인정의 시기인 셈이다. 어둠의 시기 출발점이 된 중학교 시절, 독하게 마음 먹고 공부를 하며 성적을 제법 올렸는데 그때 담임선생님이 성적표에 쓰신 단 한줄의 말이 나의 의욕을 단숨에 꺽어 버리며 '열심히 해도 소용없구나'라는 좌절을 맛보게 했다. 그 뒤로 공부는 손을 놓았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 성적표에 단정하게 적힌 글씨가 떠오르는 거 보니 사는 내내 아쉽기만 한 시절이다.
부모에게서 어떤 인정이나 칭찬의 말을 들은 적이 없던 내가 공부하는 주변 친구들에 자극을 받아 인생 처음으로 열공이란걸 해보며 스스로 성취감을 알아가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그 나이대는 그게 행복이었을 거다. 그런데 그런 성취감에 찬물이라도 붓듯이 '성적이 별로 오르진 않았지만'이라며 내 노력에 대한 평가절하의 몇마디가 나를 불행으로 이끌어 내렸다.
그렇게 나는 불행과 자연스레 손잡기 시작하고 '노력해도 소용없구나'를 뇌 속에 각인하며 무기력감에 빠지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초반까지는 얼굴도 표정이 없고 그늘져 있으며 무언가 항상 불만에 찬 듯한 모습 일색이었다. 이런 내가 스승의 칭찬과 인정, 주변 사람들의 나의 대한 재평가로 얼굴에 그늘은 사라지고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거다. 인상까지 달라질 정도였으니 관계 안에서 회복되는 힘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고 사람 인상이라는 것이 그 사람이 살아온 길이라는 평가는 절대 무시 못할 요소임을 깨우쳤다.
인정과 칭찬에 평생 목 마르게 살아온 나에게는 오아시스가 아닐 수 없었고 달라진 나의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매 순간 설레게 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난 짙은 내향성에서 외향성으로 옮겨 가게 되고 아이셋 낳고 37살에 새롭게 공부하며 시작한 사회생활이 나를 또 한번 뛰어넘게 하는 경험을 하게 했다.
그 이후 코로나 여파로 아이셋과 죽은듯, 하루에 한번 세수도 할까말까 썩은듯이 1년 넘게 보낸 시간도 있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흔들리지는 않았다. 이제는 누구의 인정이나 칭찬으로 인함이 아닌 나 스스로를 격려하고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코로나 덕분에 모든 것들이 온라인으로 대체되며 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나의 영역을 보이거나 쓰는 행위로 발돋음하게 되었다. 지금 브런치에 글을 쓰는 과정도 그 중에 하나다.
내가 가진 내향성으로 나를 탐구하고 알아가며 깨닫게 되는 것들은 나의 또 다른 면모인 외향성으로 다른이들에게 전달되어진다. 나는 전형적인 내향인이면서 사회적인 외향성 마저 갖추었기에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는 가장 최적인 셈이다. 물론 20년 이상 해온 음악이라는 직업이 한 몫 한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됐던 남에게 보이고 싶고 드러내고 싶었던 내 자아는 30대까지는 음악이라는 요소로 표현이 되었다면 40대 이후부터는 글과 말로 나를 표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란 사람은 남앞에 설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나의 행복은 내외향성을 넘나드는 성향에 남에게 보이고 싶은 관종의 맛까지 더해서 채워 나간다. 나 스스로 느끼는 행복이 나에게 주는 에너지라면 타인의 인정과 칭찬으로 더해진 행복은 나에게 덤으로 주어지는 보너스라고 할까?
최근에 읽은 최인철 교수님의 '굿라이프'라는 책을 통해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지 알게 되었다. 한동안 나는 창업이냐 지금하는 일을 계속하느냐 고민을 했다. 감사하게도 난 다재다능한 면이 있다. 카페나 샐러드&샌드위치가게를 주변에서 권유할 정도로 수준급으로 만들어 낸다. 아이셋인 엄마인지라 남편이 은근히 맞벌이를 같이 해주길 원하기도 하고 엄마인 내가 한푼이라도 벌면 아이들 학원이라도 하나 더 보낼 수 있겠단 생각에 창업을 고민했던 거다. 현실은 그렇지만 나의 이상 또한 나의 발목을 잡으면 결국 내린 결론은 하나다. 내가 더 행복할 일이 무엇일지, 그거 하나로 나의 창업은 물 건너갔다.
생각해보면 내가 돈을 벌기 위해 한 일들은 나에게 행복을 느끼게 하지는 못했다. 연주를 하는 일은 기쁘지만 강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돈벌이 수단에 가까웠고 세아이를 키우며 잠깐 경험한 사회생활 역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좋았지만 그 외 나머지 행정적인 부분은 매번 봐야하는 시험같은 거 였다.
내가 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면 분명 당장의 이익을 위해 창업을 선책했지만 내가 어떤 일을 해야 기쁘고 행복할지 아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길이 나에게 맞는 길인지 알기에 과감하게 창업은 삭제했다.
굿라이프에 보면 행복한 사람은 소유보다는 경험을 사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물론 소유의 행복도 크다. 하지만 소유는 하면 할수록 욕심이 생길 뿐이다. 나는 소유의 기쁨보다는 경험의 기쁨이 큰 사람이다. 남들이 다 산다고 해서 구매를 하지도 않고 남들이 사서 기쁘거나 행복하는 것에 나는 거의 동의하지 못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내 마음속의 차오름의 경험이 행복이고 단란하게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행복의 빛으로 다가오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돈벌이 수단만으로의 창업은 나와 맞지 않을 수 밖에 없던 거다.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행복으로의 추구인 삶이었던 걸 책을 통해 직시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내가 행복한 삶으로의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나에게 가장 맞는 삶이라는 것도 말이다.
내외향성의 공부가 이렇게 행복에 관한 공부까지 이어지면서 나에 대해 또 한번 알아가게 되고 내 삶의 대한 신조를 다지게 된다. 그 다음 스테이지는 무엇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