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동안 내, 외향인에 대한 공부를 했다. 성격이나 기질에 대한 궁금증으로 책을 많이 봤지만 구체적으로 내, 외향인에 대한 물음은 특별히 떠오른 적이 없다. MBTI가 한결같이 E로 나오는데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형적인 I인가 애매한 부분도 있었다. E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거 보면 본질은 E에 가깝고 추구하는 내면은 I가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향성을 더 많이 띄기는 한다.
내외향성은 이끌고 있는 부모 커뮤니티에서 내향인 자녀에 대한 고민이 있는 엄마들을 보고 구체적인 공부를 하게 되었다. 4권의 책을 참고했는데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선택이라 만족스러웠다. 성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고 특별히 나 스스로 가지고 있던 물음이나 내 행동이나 마음 상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어서 무척 유익한 시간이었다. 내외향성을 공부하며 행복으로 연결되어지고 관계에까지 사고가 확장되며 여러 면에서 도움을 받았던지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다.
이외 소피아 뎀블링의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참고
내 외향인의 가장 다른 점이라면 모든 사고나 생각이 안이냐 밖이냐 이다. 내향인은 내면에 집중하고 외향인은 외부에 집중한다. 서로 사고 체계가 확연히 다른 것이다. 내향인은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는 다면 외향인은 사람들 속에 섞이면서 에너지를 받는 편이라 한다. 한마디로 내향인은 혼자만의 굴 파기가 주특기라 할 수 있다. 내향인은 관계 안에 있을 때 에너지를 뺏기는 것이고 외향인은 관계 안에서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둘의 관계 방식이나 관계 형태가 다를 수 밖에 없다.
내향인이어도 성인이 되어 사회 속에 섞이면서 외향성을 갖추게 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사람들 속에 섞여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해야 한다면 내향성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거나 외향적인 척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내향인이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이다. 아마도 짐작 건데 내, 외향인이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성향이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생각해 볼 만한 것은 내외향성은 40~50프로 유전적으로 대물림된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우리 부모님이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긴 하다. 그리고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탐색해 봐도 외향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내외향성이 섞이거나 내향적인 주변인이 대부분이고 전형적인 외향인은 나에게 긴장을 유발하는 요소가 된다. 긴장을 유발한다기보다는 나와 다른 면에 긴장하게 되는 것이 맞는 말일 거 같다. 긴장하게 되면 편함보다는 불편함이 느껴질 테니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외향인과 사귀지는 않게 되는 거 같다.
사람의 기질이나 성향이라는 것은 사십 전후로 뒤바뀔 수 있다고 한다. 본래의 타고난 성향 말고 살아오면서 부모나 환경,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살아가다, 사십 전후로 본래 타고난 성향으로 회귀하려는 시기가 온다고 한다.
나 역시 그렇다. 타고난 건 외향성인데 초등학교 졸업하고(물론 나는 국민학교 출신) 중학교를 올라가는 그 시기에 완전 내향인으로 바뀌었다.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나이대로 봐서는 사춘기 탓일까?) 그 시기부터 타인의 대한 민감도가 높아지면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니 자연히 나 스스로 움츠려 들고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고 불편하니 속 편하게 나만의 굴을 파기 시작한 것이다. 굴을 파는 시기는 20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던 지라 그때까지 나는 아웃사이더로 불리었다. 같이 있으면 편한 사람이 아닌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사람이 되었고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우니 자연스레 관계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다 나의 외향성을 20대 후반에 되찾게 되면서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고 그때까지 지속하게 된 내향성은 나를 성장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로 지금까지 긍정효과를 주고 있다. 환경적으로 아이가 셋이 되면서 내외향성이 충돌하며 우울하고 무력하게 지낸 시간도 있다. 내향인에게 주어진 또는 겪는 환경은 성향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그 환경에 휩싸이느냐, 그 환경을 개선하느냐에 따라 내향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의 여부가 달라진다.
특히 아이를 키우며 나와 같은 성향에 아이인지, 완전 다른 성향인지에 따라 부모의 내외향의 변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 같은 경우는 아웃사이더의 시기를 오래 겪었기에 사회성이 부족하고 관계 맺는 것이 쉽지 않은 둘째 아이에게 안정적인 요소를 줄 수 있었다.
가령 인사하는 것이 어려운 아이에게 억지로 인사를 시키지 않기. 사춘기 시절 친정엄마가 나에게 자주 한 이야기는 '넌 인사도 안 하니, 인사 좀 해라.'였다. 난 예의 바르지 못해서 인사를 안 한 것이 아닌 쑥스럽고 창피한 마음에 단 한마디 인사하는 것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건 거다. 하지만 엄마는 알 길이 없으니 그저 '얘가 왜 저래'라는 말로 내가 인사 못하는 것을 예의 없음으로 치부해 버렸다. 내가 부모로 살아가는 지금, 부모는 아이 대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쟤가 왜 저래?!'라는 푸념이 아닌 '쟤가 왜 그럴까'라며 아이 대신 헤아려 보며 아이에게 맞는 방법을 찾고 알려주는 것이다. 아이 스스로는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없다.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그 몫은 부모다. 그 역할을 잘 감당하는 부모가 아이의 성향을 극대화 시켜줄 수 있다.
그런 기억을 안고 있기에 나는 둘째에게 인사를 억지로 시키지 않는다. 다만 편안한 분위기에서 유도는 한다. 하지만 하고 안 하고는 어디까지나 둘째 스스로의 결정에 맡긴다. 사실 나는 아직까지도 인사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 멀리서 인사해야 할 대상이 보이면 에둘러 피하거나 시선을 돌리며 내 에너지를 뺏기지 않으려 방패막을 세운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인사하기 애매한 관계일 때나 내 에너지가 없어서 굳이 마주치고 싶지 않을 때이다. 이것 역시 스스로 나를 지키는 방편이라 여기고 싶다. 그러기에 둘째에게도 억지로 요구하지 않는다. 아이만의 타고난 성향에 섣불리 엄마가 개입하지 않고 지켜주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아이의 친구관계다. 둘째는 10살이지만 친구가 없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반이라 친구라 명명할 수 있지만 친밀함을 가지고 만나거나 노는 친구는 한 명도 없다. 마침 코로나 시국이 2년째 지속되고 있는지라 둘째에게는 오히려 이 시기가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환경이었다. 엄마라면 '이러다 학교 가서 애가 왕따를 당하면 어쩌지, 이러다 친구도 없이 사회에 적응 못하면 어쩌지'라며 불안이 당연히 떠오를 수 있다. 물론 나 역시 이런 불안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당장은 아이가 친구가 없는 것에 전혀 불편함이 없고 삼남매이다 보니 친구가 없어도 놀 사람이 있으니 친구에 대한 욕구가 대신 채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발적 왕따와 타의적 왕따는 결이 다르지 않을까 하며 아이가 상처 받는 요소가 없는 것에 마음을 놓는다.
내향성의 사람이 가장 힘든 부분이 관계 문제일 거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세상 자연스럽고 편한 사람에게 타인과의 관계는 긴장과 불안을 유발하고 에너지를 쓰게 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향인에게는 많은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 마음을 나누는 단 한 명의 진실한 친구만으로도 내향인에게는 충분하다. 나 역시 관계 맺는 패턴은 친구의 수가 아닌 관계의 깊이다. 30년 이상 절친으로 지내는 친구가 서넛 있으며 아이셋을 키우지만 아이들 친구 엄마와의 관계는 사양하는 편이다. 필요의 의한 선 외는 마음을 두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세상사에 대한 관심의 폭이 다름이다.
내향인은 내면에 대한 고민과 깊이를 원하는 편이다. 그러기에 대화 주제 자체가 다르다. 물론 살아가는 뻔한 이야기도 나누긴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 것은 내향인에게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피로감을 더해줄 뿐이다. 내면을 어루만져주고 나눌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안도감을 허락한다. 그러기에 피로감을 지고 집에 돌아가면 굴 속에 어서 들어가 쉬어줘야 하지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굳이 굴 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사실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중
내 외향인은 행복을 느끼는 정도 또한 다르다. 인생에 행복도가 외향인이 높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내향인은 행복보다는 불행이나 불안 요소에 마음이 오래 머물고 외향인은 상황 그 자체를 보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 행복에 머무는 정도가 지속된다고 한다. 외향인이 더 행복하거나 내향인이 덜 행복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느끼고 바라보는 사고 자체가 다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향인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나 역시 이 사실을 알고 나서 행복에 오래 머물려고 한다. 불편한 일이나 상황에 대해서도 그 상황 자체만을 보려고 노력 한다. 내향인은 상황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이 섞여 상황 자체보다 크게 확대 해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상황을 상황으로 보느냐와 그 상황에 대한 나의 주관적 해석으로 보느냐는 큰 차이다. 이럴 때만큼은 감정을 따르기보다는 이성을 내세우는 게 객곽적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될 거다.
공부의 목적은 내 외향인을 구분하기 위함이 아닌 스스로 자기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나를 이해하면 나를 설명하는 힘이 생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를 지키는 방법도 알게 되면서 관계 안에서도 편함을 누릴 수 있다. 나를 이해함이 곧 타인을 이해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2편으로 '내 아이의 내향성'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