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모녀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지난해 가을부터 모녀 이야기를 준비하며 모녀 관련 여러 책을 보면서 마음의 답답함이 맴돌았다. 그 답답함을 가지고 12월에 부모커뮤니티에서 진행하기로 한 프로그램을 도저히 시작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내 안의 모녀 이야기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 달 이상을 준비하며 책 속에서 나의 이야기를 보았고 삶 속에서 떠오르는 엄마와 딸에 대한 질문들이 하나씩 답을 찾아감을 경험했다. 그리고 어제 비소로 책 속에서 결론이 깔끔하게 지어졌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그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던 아픔이 말끔히 나아지듯 문장이 가슴으로 내려왔다.
<엄마와 딸의 심리학> 중
어쩌면 나는 그동안 엄마와 분리되지 못한 채 엄마의 삶을 짊어지고 있었던 거다. 한평생 고생만 한 엄마가 불쌍했고 그동안 살아온 삶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엄마가 안타까웠고 그런 엄마 삶의 빛을 딸인 내가 떠 안겨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관계에 대한 지진함으로 돌덩이처럼 마음에 얹은 채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왔다. 마음과 다르게 엄마에게 가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책감으로 엄마가 짊어진 것들을 떠안고 싶지만 한편에서는 유년기의 부족했던 정서적 보살핌에 대한 억울함이 올라와서 두 마음이 심히 요동쳤던 것이다.
이 문장은 비로소 죄책감을 비워낼 수 있게 했고 내가 갈망했던 엄마에 대한 사랑의 결핍을 인정하게 했다. 어쩌면 보살핌을 받지 못한 내면 아이가 언젠가는 못다 한 사랑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 여기며 여전히 엄마의 그늘 아래 숨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으로서 엄마를 이해하지만 그 삶에 대한 권리는 딸인 내가 아닌 엄마의 몫이라는 것, 그리고 그 책임은 딸이 질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할수록 엄마인 내가 딸과 맺는 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엄마와 내가 맺은 모녀관계를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이틀 전 엄마에게 전화가 왔었다. 운동을 배워볼까 한다면서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으신다. 내 마음이 정리가 되어서일까? 그 말이 부담이 아닌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예전 같으면 엄마의 그런 말 한마디는 나에게 부담으로 박혀서 고구마를 씹지 않고 삼킨 듯 꽉 막힌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곧 말투로 나타나면 엄마는 또 한 발짝 물러서며 "알았다." 하시며 남동생에게 바로 전화해서 원하는 걸 얻으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뭇 달랐다. 그냥 반가웠고 엄마가 엄마의 삶으로 들어온 게 느껴져서 감사했다.
상황이나 서로 어떠한 액션이 있던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므로 엄마와의 관계가 부쩍 가까워지는 걸 느끼니 신기하기도 했다. 예전 커뮤니티 모임에서 엄마에게 상처를 받은 딸들은 대부분 그 부분에 대해 엄마에게 직접적인 사과를 원했던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사자 대면하듯 엄마와 단판을 짓고 싶다는 태도가 더 강했다. 하지만 모녀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느낀 건 딸이 알고 느끼는 걸 엄마도 똑같이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폭력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그 외 감정적인 학대나 정서적인 결핍은 당한 딸만 알 뿐이지 엄마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엄마에게는 엄마로서 자녀를 해하려는 악의보다는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던진 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의 입장은 서로 다른 노선을 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엄마에게 따져 묻듯이 사과를 요구하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이다. 여전히 그 사랑에 대한 확인을 받고 싶은 건 딸이 아이건 어른이 되었건 여전히 사랑받고픈 엄마의 자식인 거다.
엄마라는 존재는 딸이 아무리 밉고 내 인생을 방해하는 요물(?)인 거 같아도 그 딸이 엄마 사랑을 받기 위해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용을 쓰며 엄마에게 치대는지 알아야 한다. 딸이 사랑을 받고자 애쓰는 건 죄가 아니다. 본능이자 생존이다. 엄마에게 얻어내지 못한 사랑은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얻어내려 하기에 건강한 관계 맺음을 할 수 없다. 모자란 채로 사랑을 완성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모자란 부분을 받아들이고 모자란 대로 그 사랑을 메워갈 수는 있다. 엄마에게 얻어내지 못한 사랑은 배우자나 자녀를 통해 회복하는 경우가 있다. 다만 딸 스스로 사랑받지 못한 내면 아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사랑을 받고 싶지만 딸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기에 건강한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있다. 그러지 않고 무조건 사랑을 다오 다오 한다면 또 다른 상처받은 아이를 길러내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다.
엄마가 되어 내가 딸을 키우면서 느낀 건 오직 하나다. 이렇게 이쁘고 사랑스러운데 왜 엄마는 그러지 못했을까? 단순히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자식의 이쁨을 알아채기엔 삶이 너무도 팍팍해서? 아마도 엄마 역시 칠 남매의 맏딸로서 사랑보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가정 내에서의 위치가 있었을 거다. 실제로 엄마는 어린 시절 일만 했다고 나에게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엄마 역시 엄마사랑을 받기는커녕 밑으로 줄줄이 동생들을 보살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사랑보다는 의무나 책임을 먼저 배웠을 거다. 우리 엄마는 책임감이라고는 지상 최고의 사람이니... 그 딸인 나 역시 그 책임감을 물려받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엄마의 딸로서의 행보를 기리며 이해의 한 폭을 넓혀간다.
<엄마의 말> 최숙희 글/그림
모녀 이야기를 준비하며 먼저는 내 상처에 울분이 쏟아졌다면 알아가면 알수록 엄마의 삶이 보여 뭉클한 순간이 잦았다. 이렇게 한 사랑의 인생을 들여다본다는 건 관계의 또 다른 이해이다. 어제도 엄마는 전화를 하셔서 내 상황에 따른 도움을 주시겠다 말씀하셨다. 예전 같으면 도움을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석연치 않은 마음에 불편했을 텐데 '엄마 도와줘서 고마워.'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그런 말 한마디조차 입밖에 꺼내기 어려운 내가 자연스럽게 고마움을 표시했다는 건 그만큼 내 안의 묵힌 감정들이 비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칠십을 바라보는 엄마와 사십 대 초반의 딸이 이제야 각자의 나이에 바로 서게 된 것이다.
어른이 되고 성숙되어 간다는 건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짊어지고 온 상처들을 얼마나 마주하며 용기 있게 대처하는지에 달라진다. 노년이 되어도 그 상처에 싸매여 있으면 여전히 어린아이인 것이다. 어린아이는 자기만 바라볼 뿐 그 외 타인을 품을 수 없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내 가장 귀한 딸, 그리고 엄마를 위해서 한 번쯤은 아직 내 안에 잠자고 있는 내면 아이를 일깨울 필요가 있다. 그 내면 아이를 깨워서 이해시켜야지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야지만 건강한 딸 노릇도 엄마 노릇도 가능하다는 걸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