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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큐베리 Apr 04. 2024

[나, 임신했어. 이혼하자]

네 번째 출산

아들 둘에 딸 하나!

엄마에게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딸까지 낳았으니 나의 가족계획은 이대로 마무리되어 간다고 믿었다.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2019년 9월의 어느 날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임신했어. 이혼하자] 한동안 남편은 답장이 없었다.

임신했다는 말을 전하면서 이혼하자고 이야기하는 여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극단적으로  표현한 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나의 강력한 출산 의지를 담은 표현 덕분에 무사히 넷째를  출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셋째 딸을 낳을 때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고 말했던 남편이었기에 반응은 대충 짐작했다.

반응을 예상하고 있어서 난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출산율 최저치를 매년 갱신하는 나라에서 아이 넷을 키운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재력가가 아닌 이상은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이긴 다.

그 어려운 일을 나는 어떻게든 해내고 싶었다.

내게 선물로 와준 소중한 아이였기에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남편 역시 아이는 선물이라 생각하는 것에는 동의하면서도 넷을 키운다는 것은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힘든 일이기에 마음을 다스린다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0 서방! 우리 아이가 다른 사람 아이를 임신한 건 아니지 않은가? 자네 아이일세. 물론 쉽지 않겠지만 소중한 생명을 두고 이러는 건 아니라네."

친정부모님의 적극적인 상담과 기도후원으로 남편은 마음을 바꿀 수 있었다.




그 사이 넷째 임신 소식을 들은 주변에서는

무성한 소문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로또 맞아서 큰 집으로 이사 가더니 바로 넷째를 가졌대.”

“넷째? 로또 맞은 거지? 로또 안 맞고 요즘 넷째를 누가 낳아”

사실 넷째 아이는 이사한 지 한 달 만에 우리에게 찾아온 아이였다. 초등 고학년이 되는 아들들에게 방 하나씩 주고 싶은 마음에 무리해서 큰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제 멈추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으로 은행에 대출을 받아 이사를 감행했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리모델링까지 하며 내 집을 갖게 되었다.


21평 임대 아파트에 살던 우리 다섯 식구가 갑자기 집을 사서 리모델링을 하고, 넷째까지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로또 당첨이야기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로또 당첨은 아니에요. 로또 당첨 되었으면 크게 한턱 쏘면서 자랑했겠죠. 이 아이가 제 인생에 로또처럼 다가온 아이 인가 봐요.”

임신 소식에 함께 웃어주던 사람도 있었고,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다자녀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걱정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숨이 저절로 나오던 때도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네가 받은 복을 세어봐.

임신 축하해”

친구가 다른 말도 함께 해줬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받은 복을 세어보란 말이었다.


네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게 두렵기도 하고,

막막한 현실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고 있던

내게 힘이 되어준 위로의 말이기도 했다.

‘그래. 지금까지도 내가 무엇인가를 특별히 잘해서 셋을 키운 게 아니었지.

복을 주셨으니 아이 넷도 잘 키울 수 있을 거야. 힘내보자’ 스스로를 토닥이며 양손을 불끈 쥐었다.

출산을 앞둔 한 달 전까지 어린이집 아이들과 함께하며 넷째도 어린이집 태교로 뱃속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어떤 동생이 태어날까?’ 우리 집 삼 남매도 동생을 빨리 보게 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한 게 없었던 셋째 출산을 경험했던 나는 넷째는 순리대로 기다려보겠노라 하며 가족들과 틈나는 대로 순산을 위한 산책을 했다.

월명산, 청암산, 은파호수공원, 대형마트와 학교 운동장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인생에서 로또에 당첨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가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아이는 예정일이 지나서까지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경산이긴 하지만, 터울이 있어서 초산처럼 좀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며칠만 기다려보고,

유도분만을 하는 것도 생각해 봅시다.”

“유도분만이요?”

“약도 잘 들어가야 하고, 엄마와 아이의 호흡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잘할 수 있을까요? 유도분만은 처음이라 서요.”

나는 세 아이를 모두 자연스러운 진통을 느끼며 자연분만을 했다. 그런 내게 유도분만이란 단어는 생소했다.

유도분만은 아이와 호흡이 맞지 않다면

최악의 경우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아야 한다.

이 또한 내게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역시나 아이는 쉬운 길을 보여주지 않았다. 유도분만을 위한 촉진제를 맞았지만,

내 몸에서의 반응은 조금도 없었다.

급기야 의사 선생님은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며 2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하셨다.

‘임신으로 경험할 수 있는 건 다 경험해 보는구나.’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아가야,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엄마가 조금 더 기다릴게.

우리 아가 걱정하지 말고 나와 주렴.

엄마랑 아빠가 두 팔 벌려 환영할게.

어서 엄마 만나러 와줘.”

인생역전을 기다리며 하는 기도처럼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했다.

아이는 그다음 날 촉진제 주사를 맞은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세상에 나왔다.

출산에 대한 기억이 다 사라진 때에 그 옛날 그날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영혼까지 끌어 모아 죽을힘을 다했을 때

나는 아이와 만날 수 있었다.

엄마랑 아빠, 그리고 아들 셋에 딸 하나!

우린 여섯 식구가 되며 진짜 진짜 다자녀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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