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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20. 2023

낯선 점! 배울 점! 어려운 점!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커다란 봉투하나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여보. 이것 좀 봐봐."

"응. 엥? 이게 뭐야? 아하하하하하."

남편이 건네준 크고 두툼한 봉투를 한 아름 안으며 나도 모르게 그만 웃음이 터졌다. 봉투의 겉면은 물론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종이마다 오돌토돌한 점자들이 빼곡히 줄지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종이에 찍힌 점자들이 웃긴 게 아니라 그걸 읽을 줄 모르는 내가, 그것도 시각장애인이라는 게 왠지 모르게 우스웠다. 혹시나 하며 손끝으로 살살 만지면서 점자들을 따라가 보았지만 역시나 점자가 저절로 읽히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릴 때는 시각장애인이라면 당연히 점자를 읽을 거라 생각했다. 우편물을 보낸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점자를 배운 적도 없는 내가 점자로 된 우편물을 읽을 리가 만무했다. 나처럼 점자를 하나도 모르는 시각장애인이 있을까 싶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통계에 따르면 전체 시각장애인의 7%만이 점자를 사용한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시력이 좋지 않아서 글자를 볼 수 없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점자를 사용한다. 하지만 나는 서른이 넘은 나 중도에 시각장애인이 되면서 휴대폰의 음성안내에 익숙해지다 보니 점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더욱이 배울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요즘엔 점자가 찍힌 컵라면이나 캔음료를 심심치 않게 본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시려온다. 글자도 안 보이고 점자도 모르는 지금의 나는 과연 누구일까? 다시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경계에 선다. 언젠가는 기필코 점자를 배우고야 말겠다는 작은 다짐도 해본다. 어쩌면 구태어 점자를 몰라도 살아가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을지도 모른다.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덕에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종이에 적힌 글자는 물론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아도 그 물건이 인지 알려주는 세상이다. 그래서인지 점자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좀처럼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다.


작년에 남편이 사준 점자 시계가 하나 있다. 시계를 선물 받았을 때만 해도 점자공부를 열심히 했다. 점자 시계는 점자를 모르면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점자는 6개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겨우 6개에 불과한 점들이 두더지게임이라도 하는 듯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면 그 점들의 위치나 순서에 따라 자음과 모음이 결정되고 그걸 조합하면 하나의 글자가 된다. 나는 여태껏 내 손가락이 남들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줄 알았다. 적어도 점자를 만져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막상 점자를 읽으려고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도무지 잘 느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겨우 느낀 점들을 머릿속에서 자음과 모음으로 구분하고 하나의 글자로 만들기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내려놓기도 쉬웠다. 어느새 점자시계는 서랍 속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고 나는 다시 휴대폰의 음성안내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젯밤 불현듯 다시 점자를 익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랍 속에 꽁꽁 숨겨둔 시계를 꺼냈다. 여전히 점자는 낯설기만 하다. 그나마 작년에 조금이라도 배워 둔덕분인지  두더지들이 알려주는 숫자들이 신기하게도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고 머릿속에 곧바로 떠올랐다. 낯섦과 익숙함 의 사이에서, 그리고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경계에서 가 얼마나 머물지는 알지 못한다. 고 느린 걸음이지만 한발 한발 딛다 보면 언젠가는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날이 오리라 믿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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