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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10. 2023

느리게 걷는 사람

 주인이 외출한 빈 집이었다. 갈색의 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잡곡통을 실수로 쳐서 떨어트렸다. 그 덕에 안에 들어있던 콩들이 쏟아졌고 바닥에는 크고 작은 콩들이 나뒹굴었다. 급하게 다시 콩을 주워 담으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통이 터무니없이 작았다. 하는 수없이 담은 콩들을 모두 바닥에 쏟아붓고는 두 개의 비닐봉지에  나눠 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콩들은 좀처럼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집주인이 곧 돌아올 거란 생각이 들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콩을  하염없이 담다 보니 왠지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연히 고개를 들었는데 한 남자가 하얗고 작은 플라스틱의자에 앉아있었다. 그 남자는 얼굴이 크고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데 한쪽입은 올라가 있고 눈은 찌그러진 채 나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섬뜩했다. 순간 멍해졌다. 그는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던 주황색의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잠시뒤 그의 몸은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흔적도 없이 사다.


꿈을 꾸었다. 나는 원래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주로 복권을 사고 싶을 만큼 설레는 꿈을 꾸거나 하루종일 찜찜한 기분이 드는 꿈을 꾼다. 그제의 꿈은 후자였다. 꿈속의 그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콩을 주어 담는 내 손이 너무 느린 나머지 '차라리 안 보련다.' 할 정도로 답답했을까? 확실한 건 이틀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찜찜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콩을 쏟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니, 그런 꿈을 처음부터 꾸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꿈이 어디 마음대로 꿔지던가. 꿈도 인생도 어디 하나 마음 되는 건 없었다. 그렇다고 음먹 대로 되지 않을 일도 없었다.


아무리 나쁜 꿈이라고 할지라도 잠에서 깨면 그걸로 그만이다. 그런데 그때 느꼈던 기분은 오래가는 듯하다. 만약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면 질 좋은 수면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잠이 들게 되면 깊은 잠에 빠지는 비렘수면상태와 꿈을 꾸는 렘수면상태를 반복한다. 그러나 잠들기 전에 휴대전화의 빛을 많이 쬐거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이러한 렘수면이 길어져 꿈을 많이 꾸게 된다고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모전에 도전했었다. 집안일을 미뤄두고 밤낮으로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번갈아가며 글을 썼다. 공모전에서 요구하는 분량을 맞추는 게 생각보다 힘들 글은 점점 너덜너덜해져 갔다. 여기저기에서 날아오는 피드백에 상처를 입고 잠시 멘붕이 왔었다. 수십 번의 퇴고를 했지만 답이 없었다. 다시 쓴다 해도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살림은 살림대로 엉망이 되었고 아이들에게도 소홀해졌다. '나는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걸까' 어디를 향해 가는 건 줄도 모른 채 떠밀려 가고 있었다. 자란 부분을 채우려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구멍이 났다. 결국은 미흡한 실력이 문제였다. 글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 경거망동이 따로 없었다. 기초부터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한 건 어떤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무겁고 축축한 마음을 햇볕에 말리듯 널어 말리고 싶었다. 그 작은 바람대로 글을 쓸 때마다 가벼워지는 마음을 느꼈다. 그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게도 욕심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공모전에 도전하고 싶었고 그런 내 모습이 좋았다. 운이 좋으면 상도 하나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욕심이다. 엄마의 구드를 몰래 신은 아이처럼 한 발짝 떼기가 힘들어 구두를 질질 끌어야 했다. 발이 아팠다.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좀 작아 보이면 어떤가. 그 구두가 아니면 또 어떤가. 더디게 걸어도 좋다. 대단하지 않아도 된다. 내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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