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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Dec 27. 2023

나의 2023년 하이라이트

올해가 고작 닷새도 남지 않았네요. 2023년의 마지막 보름달이 뜨는 날에 편지를 띄웁니다. 


항상 그렇듯 연말에는 그해를 돌아보게 하는 질문을 마주하게 돼요. 게다가 각종 서비스나 플랫폼을 사용하는 시대이다 보니, 연말 결산하는 이벤트를 종종 접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한 해 동안 내가 자주 들은 음악을 알려주기도 하고, 블로그에는 몇 건의 글을 썼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글을 조회했는지 알려주는 식이죠. 정기구독으로 읽고 있는 도서추천 뉴스레터에는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템플릿을 제공해 스스로 독서 연말 결산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더라고요. 올해 나를 가장 많이 바꾼 책이라던가, 표지가 가장 마음에 드는 책과 같은 기준을 가지고요. 이렇게 연말을 회고하는 일은 한해를 내가 어떻게 보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합니다.


저 역시 나름의 연말 결산을 해볼까 합니다. 주제는 뭐가 좋을까요? '나의 2023년 하이라이트'라고 이름을 붙여볼게요. 올해는 제게 뜻깊은 일이 정말 많았거든요. 작가로 전향하기 위해 10년 가까이 다닌 직장을 그만둔 것, 미술심리상담사라는 새로운 직업을 얻은 것,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첫 해외여행으로 그리스를 다녀온 것, 그 여행을 토대로 새 브런치북 『보름의 그리스』을 발간한 것,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대중 행사에 참여하여 그림을 사람들 앞에서 소개한 것 등 특히, 일과 관련한 하이라이트가 무척 많습니다. 


그러나, 두꺼운 펜으로 쓰고 눈에 띄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쫙 그을만한 이 하이라이트 사이에서 제가 꼽는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습니다. 세밀한 연필로 쓰고 무엇으로 꾸밀까 한참 고민하다 결국에는 그 여백이 마음에 들어 그대로 두기로 한 하이라이트는 친구를 다시 만난 일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함께 그림을 그리며 친해진 친구였습니다. 저와 친구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한 후로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함께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물론이며, 저는 중요한 '하이라이트'마다 늘 이 친구를 생각했습니다. 미역국을 끓여가며 서로의 생일을 챙겨주고, 여름에는 마음껏 물장난을 칠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가을에는 풀벌레 우는 곳에서 잔잔한 음악을 함께 들은 기억도 있습니다. 여행을 다녀올 일이 있으면, 친구에게 줄 선물을 항상 고르기도 했고요. 늘 하하 호호 웃을 일만 있던 것은 물론 아니었죠.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속내를 친구에게 슬며시 보여주면, 현란한 언변과 대단한 해결책이 없더라도 친구는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제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던 이십 대의 중반, 일상의 복잡함을 정리하기 위해 떠난 여행길의 시작에도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는 가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라며 필통 가득 펜을 담아주었습니다. 저는 배낭에 그것을 챙겨가 매일 일기를 썼고 마음이 가는 것을 마주하면 오래 머물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때 기록은 제 첫 여행기인 『일몰을 향해 가는 길』이 되었죠. 이제 보니, 이 친구는 제가 글을 쓰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네요.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앞으로 연락하고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메시지만 남기고 증발해 버렸어요. 친구는 때때로 자신 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터라 그때마다 얼마 후 돌아오겠다는 말을 했고 늘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친구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어요.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기약 없이 떠난 일은 없었으니까요. 우리에게 작별은 있어도 이별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화가 났습니다. 적어도 인사할 시간은 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제 목소리는 방향을 잃었습니다. 


얼마 간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문득 친구가 떠오른 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힘듦을 친구가 헤아려준 만큼 나는 친구에게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요. 내가 친구에게 그런 존재였다면 친구가 그렇게 갑자기 사라질 만큼 힘들어할 일이 없었을 텐데. 그제야 스스로 지닌 모자람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원망의 마음이 사라지고 그리움이 채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치 이전의 보름달이 지고 새로운 보름달이 뜨는 것처럼요.


올해는 보름달이 열세 번 뜬 해였습니다. 8월에 두 번의 보름달이 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그중 두 번째 뜨는 보름달을 보름달의 색과 상관없이 블루문이라고 부릅니다. 블루문은 보름달의 주기가 29.53059일이라는 30일에서 조금 모자란 숫자로 이뤄져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보름달의 주기가 태양력과 같았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이죠. 


8월의 두 번째 보름달을 며칠 앞둔 날, 놀랍게도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서로 자초지종을 묻기보다 우리는 어서 만날 날을 정했습니다. 그때, 저는 제주도에 있었기에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보기로 하고 구체적인 약속부터 잡았어요. 친구가 마냥 반갑기만 했거든요. 마치 블루문을 마주한 것처럼 말이에요. 한 달에 한 번이 아닌 두 번의 보름달이 찾아왔을 때 느낀 감동 같았습니다. 더불어 제가 스스로 모자란 구석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한 달에 두 번 뜨는 보름달을 보고도 아무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다시 제게 찾아와 문을 두드려준 친구의 용기를 가볍게 지나쳤을 테니까요. 


네, 저의 2023년 하이라이트는 블루문과 찾아온 친구라고 해야겠습니다. 모자란 제게 다시 친구가 되어 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요.




이천이십삼 년 열세 번째 보름달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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