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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Feb 18. 2024

과정이 즐거운 일을 하고 있어요.

가위질을 하는 그림을 그립니다.

은애 님에게


편지와 함께 보내준 사진을 보며 무척 반가웠어요. 지난달, 은애 님 집을 다녀간 기억 덕분에 눈에 익은 공간을 화면으로 마주하니 괜히 반가운 거 있죠? 사진 속 아이들의 모습도 그렇고요. 다음에 저희 집에 초대하겠다는 약속도 속히 지키고 싶습니다.


은애 님 편지를 밤에 보면 마음을 들떠서 당장 편지를 쓰고 싶을 까봐 이번에는 꾹 참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봤답니다. 은애 님은 이 미루는 마음을 아시나요? 이따 집에 가서 볼게, 하는 말과 함께 받은 편지를 그 자리에서 바로 보지 않고 그대로 가방 안에 밀어 넣는 것 말이죠. 편지를 받은 기쁜 마음은 대게 속도가 빠른 편이라 편지에 적힌 문장을 빠르게 훑어내 버리더라고요. 편지 읽기를 미루는 것은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게 제 속도를 찾도록 여유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집에 도착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따듯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그제야 천천히 편지를 읽습니다. 그럼 보낸 이의 마음이 선명히 드러나거든요.


전해준 은애 님의 밤에 감사한 일이 가득하다니! 편지를 받으며 저 역시 감사했습니다. 한편으로 신기하기도 했어요. 이번주에 있을 상담의 미술치료 프로그램을 구성하며 잡은 주제가 '감사'였거든요. 하루 일과를 돌아보고 일상에서 감사의 요인을 찾고 마지막으로 감사일기를 쓰는 것이 제가 정리한 프로그램의 개요예요. 감사는 마음이 다치고 힘들 때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회복탄력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해요. 특히, 일상에서 갖은 스트레스를 마주하는 현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죠. 보통 일상은 단조롭고 평범하고 특별할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감사한 일을 찾으라고 하면 대게 어려워하거든요. 하지만, 내가 행복해지고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상을 바꾸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 현실이죠. 그래서 내 일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고 저는 그것이 감사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에 대한 고민이 많고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꾸려가는 은애 님이 감사 일기를 쓴다는 말에 아, 은애 님은 역시! 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답니다.(웃음)


셀프 상담을 통해 제가 찾은 일상에서 감사한 일이에요.

편지에서 제 작품 활동에 대해 물어봤죠? 저는 색을 칠한 종이를 자르고 붙이는 콜라주(Collage)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고, 주로 밤이라는 시간대를 주제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어요. 이 두 가지 모두 할 이야기가 많은 터라(하하) 이번 편지에는 작품 기법에 대해서만 쓰려고 해요. 이렇게 또 미루는 마음을 드러내 봅니다. 그래도 괜찮죠, 은애님?(웃음)


지난밤도 자기 바로 전까지 가위질을 했답니다. 오른손에 가위를 쥐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에 새삼 감사한 순간이었어요.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림을 그렸거든요. 엄마가 일찍 발견해 준 덕분이었어요.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네 살 전부터 이미 집에서 그림이며 색종이 접기며 이것저것 좋아하는 미술 활동을 했다고 해요. 제 기억에도 엄마가 만들어 준 놀이방 한 벽을 제가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도록 해줬어요. 그 앞에서 찍은 사진도 앨범에 여러 장 꽂혀 있고요. 마침 이번 명절에 만난 엄마가 제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나는 요새 네가 가위로 별을 오리는 걸 보면서 은영이가 어릴 때 가위질하던 기억이 나는 건가 물어보고 싶었어. 하도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잡지 같은 걸 구해다 주면 네가 그렇게 가위질을 했거든. 어느 날은 네가 사자를 오리는데 사자 꼬리의 털 하나하나를 끊기지 않게 오리는 거야. 얼마나 신기했는지 그 작은 손으로 하나도 끊기지 않게 자르더라니까.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나."


어릴 때도 그렇게 가위질을 했다니! 사실, 사자 꼬리의 털을 하나하나 장인정신으로 오려낸 기억은 없어요. 어린 시절 제가 가위질하던 기억은 유일하게 엄마가 외출한 어느 날, 색종이를 같은 모양으로 여러 개 자르고 싶은 마음에 한 번에 여러 장을 겹쳐 자르다가 손가락 살을 가위날로 벤 일 뿐이거든요. 그 마저도 엄마한테 혼이 날까 봐 꽁꽁 숨기느라 애썼던 기억의 더 이전에 사자 꼬리털을 만들던 내가 있었다니. 어쨌든 엄마가 기억하는 과거의 내 모습이 지금과 겹치는 건 무척 신기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종이를 잘라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이 이 과거의 경험에서 이어진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미술에 익숙한 일상 끝에 미대를 진학하고 디자이너로 근무하면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제게 당연한 결과였어요. 워낙 오랜 시간 동안 그림을 그렸으니까요.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림을 '잘' 그리기만 하는 것이 아쉬웠어요. 잘 그리는 것 이상으로 내가 지닌 감성이 드러나는 그림을 원했거든요. 자기 스타일대로 그려내는 사람들을 한동안 부러워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가위였어요. 전에 주로 선호했던 매체인 펜이나 색연필은 자꾸만 사실적인 묘사를 하게 됐거든요. 그러다 보니 결과에 매몰되는 기분인데 가위질은 그림이 과정에 있어요. 결과는 그 과정에 따라오는 것이고요. 앞서 말한 미술 매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밀한 표현이 어려운 가위는 늘 제가 생각하는 것 너머의 조형을 표현하게 해 줬어요. 비로소 똑같이 그려내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그렇게 가위질을 '다시' 좋아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가위질을 하고 있네요. 아마 손가락 뼈 마디가 닳기 전까지는 계속 이렇게 가위질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종이에 칠을 하고 가위로 오려 붙여 그림을 만들듯이 그리는 이 과정이 즐거워요.

물론 결과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라 꼭 과정만을 치켜세우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과정이 즐겁지 않은 채 따라오는 결과는 그것이 큰 성과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마냥 기쁘진 않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은애 님은 어때요? 과정과 결과, 이 두 가지를 두고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요?


우수는 다음 주 월요일이던데 편지를 쓰는 지금 겨울비가 내리네요. 우리는 지금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과정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계절의 과정을 착실히 겪어 나가면, 어느새 봄에 닿아 있겠어요. 날이 따듯해지면 집으로 초대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날도 덩달아 곧 다가오겠고요. 은애 님의 아이들에게는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귀띔해 줄 수 있나요?


은애 님, 그럼 한 주 또 즐겁게 보내고 우리 편지로 만나요. 안녕 :)



2024. 02. 15.

겨울비가 내리는 아침,

은영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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