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1은 상상이라는 가능성에 맡길게요.
시간의 쓸모를 다르게 고민하고 있는 은애 님에게
“젊은 날에는 완성형의 나를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 돌이켜보면 살아왔던 모든 순간들이 다 삶 그 자체”였다며 전해준 은애 님의 편지에 현재의 순간을 소중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방금 막 동네에 자주 가는 비건 카페를 찾았어요. 아침에 병원 진료를 다녀왔는데 집에 그냥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은애 님에게 편지를 쓰겠다는 핑계로 평소와 다른 오전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이곳을 찾았습니다.
보통 저는 오전 시간을 온전히 집에서 보내곤 하는데요, 아침의 고요함 속에서 시간을 느리게 보내고 싶기 때문이에요. 오전에는 주로 가볍게 요기를 하고 메일함으로 날아든 구독레터를 읽습니다. 어느 정도 충전이 되었다 싶으면 그때부터 쓰기 시작해요. 최근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기록하거나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쓰는 편지에 대한 구상을 하거나 은애 님에게 편지를 받은 날이면 답장을 쓸 궁리를 합니다. 쓰는 동안 몸과 마음의 근육을 풀어주며 본격적으로 하루를 시작할 동력을 얻습니다.
반면,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외출을 한 탓에 사뭇 다른 에너지 흐름으로 하루를 보내게 되었어요. 평소와 달리 경쾌한 기운을 느껴봅니다. 출근 시간에 북적이는 지하철, 근면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의료진들의 또렷한 눈빛, 예정된 시간에 맞춰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하는 카페, 그 공간을 메우는 적당한 리듬감의 음악, 도란도란 서로에게만 들리도록 나누는 대화의 목소리, 비가 온 탓에 도로를 달리는 차의 소음마저 시원하게 들리는 그런 아침입니다. 은애 님이 공유해 준 “너무 좋다”라는 순간과 비슷한 맥락의 시간이지 않나 싶어요.
저는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이 아니지만, 은애 님이 이야기해 준 〈디어 마이 프렌즈〉는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름 아닌 제가 노인의 삶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에요. 서울을 떠나는 선택지를 늘 마음에 품고 사는 저는 노인을 제가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이웃으로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물론 도시 생활에서도 노인과 교류하는 일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노인이 인구의 많은 수를 차지하는 소도시는 노인을 중심으로 두고 그 지역의 생애를 논하는 일이 자연스러우니까요. 은애 님이 짚어준 드라마의 대사에서 언급된 ‘시한부’라는 말은 안타깝게도 소도시라는 주체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인프라와 인구가 밀집하는 우리나라는 소도시의 운명이 ‘소멸’이라는 단어와 결속되어 있기 때문이죠.
소멸을 당연한 것으로 즉, 소도시를 시한부의 삶으로 치부하고 삶이 연장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상상을 중단한다면 정말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반갑게도 우리나라 여러 곳곳에는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커뮤니티들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그중 하나가 제가 이번에 워케이션을 다녀온 강화도입니다. ‘잠시섬’이라는 말랑한 이름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강화유니버스는 이 지역을 찾는 이들이 다양한 영감과 감각을 누려볼 수 있도록 경험의 장을 마련하고 있어요. 일과 여행, 둘 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는 잠시섬 11기에 ‘노마드’라는 키워드로 섬살이 유형을 선택해 다녀오게 되었고요. 그 밖에 미식가, 예술가, 모험가, 기록가 등 다양한 섬살이 유형으로 강화도라는 지역에 접속해 나라는 사람을 탐구해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에서 일반적으로 소비하는 소도시의 이미지와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을 상상해 보고 체험해 보는 것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상하는 주체가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그 주체가 소도시이든 노인이든 혹은 노인과 이웃하는 그 누구든 상상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소멸의 운명을 비껴갈 수도 있겠죠. 언젠가 끝이 있는 시한부일지라도 상상이라는 에너지는 안에서 밖으로 향하기 마련이기에 주변을 가능성이라는 움직임으로 물들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나는 죽더라도 내일을 살아가는 누군가는 그 상상을 이어받아 삶을 연장시키며 살아갈 테니까요. 저는 이런 점에서 소도시에서 펼쳐지는 상상이 좋습니다. 상상이야말로 소멸에서 생성으로 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밤 9시 30분이 되면 잠시섬에 머무는 모든 이들이 라운지에 모여듭니다. 바로 그날의 회고를 하기 위해서예요. 회고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잠시섬에서 함께 지내는 이들과 나누는 시간입니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보낸 하루에 대해 10점 만점에 오늘의 점수를 매깁니다. 이 시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은애 님에게 전하자면, 저는 10점 만점에 10점을 준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요. 아무리 즐겁고 행복했던 날에도요. 사실 점수를 매겨보라는 안내를 듣자마자 최대 점수를 9점으로 정해두었거든요. 이유는 간단해요.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 10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숫자이니까요. 인간의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숫자를 상징적으로 9라고 이야기합니다. 10이 되기에 1이 모자란 숫자 9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겸허하게 해 줘요. 10을 이룬 날에도 1은 내가 아닌 타인이나 타 존재에 의해 채워지거나 운이 작용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해 주죠. 또한, 매번 10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둔다면 9나 8의 행복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게 될지도 모르죠. 아니, 0이나 1도 소중한 날들의 일부임에는 분명하니까요.
다시 은애 님이 전해준 편지에서 발견한 문장으로 돌아가봅니다. “젊은 날에는 완성형의 나를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 돌이켜보면 살아왔던 모든 순간들이 다 삶 그 자체“였다는 것은 10이 되기 위해 달려가기보다 0에서 9까지의 다양한 숫자로 점철된 삶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비록 내 하루가 3점이었다고 해서 내 인생 전체가 3점이 아니듯이 오늘의 점수에 마음을 쓰며 낙담하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도적으로 1을 비워뒀습니다. 기분 좋은 일들로 꽉 채워 9가 되었어도 나머지 1은 앞서 말한 상상으로 남겨둔다면, 우리 삶은 10점 만점이 아니라 30점 만점 혹은 100점 만점 아니 그 이상도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상상은 무한대로 이어지니까요.
매번 손글씨로 빼곡히 편지를 적어주는 은애 님의 마음에 감사하고 있어요. 이번 편지는 은애 님이 ‘오랜만에 앉은 엄마의 식탁에서‘ 썼다는 말에 잠시 눈을 감고 상상을 해봤습니다. 안동에 있는 저희 엄마의 식탁을요. 책상을 따로 두지 않아 저희 엄마는 글씨를 쓸 때면 늘 식탁에서 책과 노트를 꺼내 펼치시곤 해요. 하루 세 번의 끼니가 펼쳐지고 치워지는 그 공간에 종이와 펜이라는 건조한 것들이 놓이지만, 이내 밥상의 온기가 스며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식탁에서 쓰는 글은 늘 든든한 배부름을 가져다줍니다. 남은 한 톨의 밥알까지 잘 먹은 듯 은애 님의 편지도 잘 읽었어요.
며칠 후, 코엑스에서 열리는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참가하기 위해 바쁜 한때를 보내는 중입니다. 그곳에 은애 님이 와준다는 말에 정말 감사했답니다. 카페에서 차 한 잔 하는 것처럼 오래 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리 얼굴 보며 이야기 나눴으면 해요! 아... 상상만 해도 벌써 반갑네요 :)
2024. 05. 07.
비가 잠시 멎은 화요일 오전,
은영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