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편지할게요.
여유를 즐기고 있는 은애 님에게
티셔츠를 맞춰 입고 방긋 웃는 얼굴로 다 같이 찍은 은애 님의 가족사진에 마음이 뭉클해지는 아침입니다. 첫째 아이의 생일이라고 했죠? 그래서인지 아이의 미소가 제일 눈에 들어오네요! 무척 즐거워 보여요. 늦었지만, 제 축하의 인사도 아이에게 전해주세요. 생일 축하한다고 말이에요!
저 역시 신의 축복이 내린 저희 집에 은애 님을 초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집에 초대하겠다고 말을 꺼낸 건 올 초였던 거 같은데 어느새 무더위의 전조가 보이는 초여름을 맞이하고 있네요. 꽤 늦어졌지만, 더 늦어지지 않도록 꼭 은애 님과 은애 님의 아이들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제가 여행을 다녀오고 여름의 기운이 물러나면 꼭 놀러 오세요! 저희 동네에 유명한 빵집도 몇 군데 있는데 빵순이의 고백이 가득했던 이번 편지를 생각해 보면 은애 님이 왠지 좋아할 것 같아요!(웃음)
아참, 이번 편지에는 유독 은애 님의 귀여운 면을 많이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당근을 30년 넘게 싫어했다던 은애 님의 문장이 왜 이리 귀여운지! 게다가 요새는 향긋한 당근의 매력에 빠진 은애 님에게 제가 요새 밀고 있는 수제 당근라페를 맛보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된 김에 은애 님이 저희 집에 오는 날 당근 파티를 열어볼까요? 당근을 생으로, 찜으로, 부침으로, 튀김으로...! (과하다 과해! 하하!) 더군다나 저와 함께하는 비건 식사가 즐겁다니! 감사해요, 은애 님. 매 순간 제약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처지를 지키고 싶은 신념 그 자체로 바라봐주며 함께하는 사람들 덕분에 비건을 지향할 맛(?)이 나는 것 같아요. 바로 은애 님과 같은 사람들 덕분입니다.
제가 비건을 지향하게 된 계기는 『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라는 책에서 어느 에코페미니스트의 글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지난 N번방 사건을 접하며 죄의식 없이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유통한 이들을 향해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유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서술된 글을 읽으며 나 역시 여성 동물의 성착취물을 소비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으로 우유를 바로 끊게 되었어요. 매체에서 만들어진 젖소라는 이미지는 원래 존재하지 않으며,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계속해서 송아지를 낳고 비정상적인 양의 우유를 생산하며 평균 수명보다 훨씬 짧은 생을 살다가 도축되는 암컷을 통해 우리가 우유를 마셔왔다는 사실을 말이죠. 태어나고 죽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어미의 젖을 물지 못한 채 죽어가는 새끼를 생각하며, 그 새끼에게 돌아가야 할 우유를 내가 마셨다는 죄의식에 아득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과한 욕심으로 인해 자행된 비극이라는 사실에 더는 우유가 음식으로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고요.
그 후로 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고 여성주의 저널 '일다'를 통해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환경과 비인간동물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의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결코 그 담론으로 나아갈 수 없는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을 공부하며 스스로 '에코페미니스트'라는 수식어로 저를 정체화하게 되었고요. 정체성이 부여되니 신기하게도 그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더욱 스스럼없이 하게 된 것 같아요. 우유를 끊는 것으로 시작한 저의 비건지향이 이젠 순수 채식인 비건으로 이어지기까지 말이죠. 물론 아직도 어렵고 부족한 부분도 많다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습니다. 혹시, 은애 님이 더 읽어볼 만한 글이 있을까 하여 일다에서 글을 찾아 여기에 남겨요. 궁금한 것이 있었다면, 도움이 되길 바라요!
이제 정말 여행이 며칠 남지 않았어요. 이틀 뒤면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릅니다. 이번 여행은 지난 12년 전에 다녀온 카미노 데 산티아고 즉,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두 번째 여정입니다. 혼자 다녀온 첫 번째 여정과 다르게 이번에는 여행 메이트가 있어요. 바로, 엄마예요. 성인이 되고 나서 엄마랑 온종일 붙어 지낸 적이 과연 며칠이나 될까 싶은데 이번에는 자그마치 두 달을 함께 지내게 되었어요. 그 과정이 어떨지 아직 잘 상상이 되지 않지만, 설렘과 걱정이 공존하는 아슬아슬한 기분입니다.
여행은 언제나 저의 변치 않는 스승입니다. 특히, 장기여행은 매번 저를 변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곤 했고요. 이번엔 또 어떤 변화를 맞이할지 무척 두근거려요! 두 달 뒤 까맣게 탄 피부로 한국에 돌아올 저를 기대해 주세요. 이야깃거리가 무척 많을 거예요. 아참, 스페인에서 은애 님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요. 메신저로 주소를 꼭 남겨주세요. 꼭이요!
그럼, 은애 님. 우리 건강히 지내다가 다시 만나요. 보고 싶을 거예요 :)
2024. 06. 03.
여행을 이틀 앞둔 월요일 아침,
은영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