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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Jun 21. 2024

달이 차오르는 것처럼 걸음을 내디뎌 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편지는 모쪼록 ‘안녕’한 지 여쭙고 싶어요. 아무래도 제가 한국과 먼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 있거든요.


제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에요. 12년 전 겨울의 어느 날, 저는 이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요새 이곳을 다시 걸으며 기억 속에 있던 장면을 생생하게 다시 꺼내 보곤 해요. 예전 모습과 사뭇 달라진 분위기도 분명 있지만, 변한 것 하나 없이 그대로 한 곳을 향해 가리키는 화살표를 보며 저는 12년 전 그때의 저를 다시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버려 종종 곤란하기도 하죠.


며칠 전 Daughtry의 노래 〈Home〉을 들었습니다. 이번 여행을 와서 처음으로 들은 음악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의 기록을 살펴보니 그때의 제가 나헤라에서 벗어나며 그 노래를 들었다는 글이 남아 있었거든요. 여지없이 저는 이번에도 나헤라에서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로 향하는 길에 그 노래를 듣기로 한 것이죠.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길을 걸으며 지나치는 나헤라는 전체 여정 중 사분의 일 정도 되는 지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순례의 초행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런 나헤라에서 다른 노래도 아닌 집에 대한 노래를 듣는다는 건 어쩌면 잘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때의 제가 왜 그 노래를 들었는지 그 이유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제가 그 노래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고 든 깨달음이 늘 저를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해외여행을 익숙하게 하지 못하던 제가 집에서 머나먼 나라까지 날아와 이 길을 걸으며 새삼 알게 된 것은 결국 이 길이 집으로 가는 여정이었다는 거예요. 돌아가야 할 곳이 다름 아닌 내가 서고 기대고 쉴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여행은 그 사실을 여실히 깨닫게 해 준 수단이었을 뿐, 현실을 대체할 답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지금 집이 몹시 그리워요.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 길을 마치고 돌아가게 될 제 현실이 기다려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두르지는 않을 거예요.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조급해질 때마다 대신 달을 바라보며 스스로 다독이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보는 달은 제 터전에 떠오르는 달과 같은 달이니까요. 그리운 제 마음을 달에 담아 보내면 제가 없는 집에 대신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용한 상상도 해봅니다.


그런 의미로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성실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이어가 보려 해요. 날이 지나면서 차근히 차오르는 달처럼 말이죠. 이처럼 늘 그랬듯 저는 보름달에게 부지런히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럼, 저는 내일의 걸음을 위해 이른 잠에 들까 합니다. 당신의 걸음 끝에도 집이 있길 바랄게요.



이천이십사 년 여섯 번째 보름달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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