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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May 22. 2024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주세요.

지난주, 대전을 다녀왔습니다. 좋아하는 언니를 만나고 왔거든요. 함께 대학교 생활을 보낸 언니인데 저는 그 언니가 하는 것들이 좋아 졸업 후에도 줄곧 쫓아다녔습니다. 지금은 언니가 대전에서 지내는 터라 다녀오게 된 것이고요.


우리는 언니가 찾아 준 어느 뮤직 펍에 가서 술을 한두 잔 마셨습니다. 흘러나오는 언니의 신청곡 〈김현철의 그대 거짓말도 보여요에 몸을 흔들며, 맞은편에 앉아 언니가 마시는 기다란 칵테일 잔에 담긴 핑크빛 '사랑의 경로(The Path of Love)'라는 이름을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메뉴에 쓰인 신승은의 노래 제목에서 따온 칵테일이라는 부연설명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생각한 칵테일의 이름을 말이죠.


경로라는 것은 방향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지 않나 싶습니다. 특정 목적지를 두고 가던 길에서 벗어나면 들리는 음성 "경로를 이탈했습니다."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 문구를 생각하면 더욱이요. 즉, 목적지가 있기에 경로가 있는 셈인 거죠. 제가 서울에서 대전까지 언니라는 목적지를 둔 경로를 통해 뮤직 펍에 도달한 것처럼 말이에요.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어김없이 동쪽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 방향에 보름달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매번 경로를 수정할 필요가 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보름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무척 큰 위안을 주기도 하죠. 내가 익숙하게 아는 경로를 거치기만 하면 어려움 없이 애정하는 대상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고요한 낭만이 또 있을까요? 아끼는 마음이 향하는 곳이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나 장소가 될 수도 있겠죠. 제게 그것이 동쪽에 뜨는 보름달이며, 대전에 사는 언니이며, '사랑의 경로'라는 멋진 이름의 칵테일을 파는 뮤직 바가 될 수 있는 것처럼요.


정말 그 뮤직 바가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마 이 편지를 읽는 분이라면, 좋아하던 장소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겁니다. 얼마나 많은 식당을, 펍을, 카페를, 서점을, 영화관을 우리는 떠나보냈던가요. 혹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지만, SNS로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단골 행세를 하다가 별안간 접한 폐업 소식에 마음 아파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요. 주인의 취향이 물씬 묻어나는 공간을 더 자주 찾았더라면 사라지는 속도를 늦출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며 때늦은 후회도 떠오릅니다. 이래나 저래나 나중을 기약한 자신이 가장 미웠고요.


"언니, 나 여기 다음에 또 오고 싶어."


저는 언니가 '사랑의 경로'를 주문할 때, 같이 시킨 수정과 베이스의 칵테일 '욜라탱고(Yo La Tengo)'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습니다. 그 칵테일은 뮤직 펍의 이름을 빌려 지어진 것이었어요. 스페인어 "Yo la tengo."는 영어로 "I've got it."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뮤직 펍의 이름도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치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경로를 명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뮤직 펍에 모여든 모든 이들과 더불어 펍이라는 장소 역시 저마다 경로를 지니고 방향을 가리키며 나아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펍을 메우는 음악 소리가 더욱 다채롭게 들렸습니다.


"그래, 네가 대전에 오면 또 오자."


우리는 핸드릭스 진토닉과 이탈리안 마가리따를 한 잔씩 더 마시며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경로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려면 다음이 있어야 하는 법이죠. 가지 않는 길은 경로가 될 수 없을 테니까요.


이번 편지는 제가 그날 뮤직펍에 신청한 곡인 Alvvays의 〈Dreams Tonite〉을 함께 전합니다. 노래의 가사가 쓸쓸한 구석이 있지만, 제가 종종 밤에 듣기를 좋아하는 곡이라 들어보셨으면 해요. "If I saw you on the street, would I have you in my dreams tonight?"이라며 노래를 하는 이는 마치 길을 잃은 듯 보입니다. 경로를 생각하는 오늘 밤, 그가 부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길 바라봅니다. 혹, 노래의 가사가 전하는 슬픔에 공명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도 오늘 뜨는 보름달이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보름달에게 감사의 마음을 함께 띄웁니다. 동쪽으로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는 보름달에게 요. 그리고 바랍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달라고. 그러면, 보름달이 우리에게 무한한 위안이 되어주지 않을까요?




이천이십사 년 다섯 번째 보름달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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