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엄마가 보내주는
돈이 무서워

상재가 말했다.

by 김종연

난 힙합을 즐겨 듣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홍대병'에 시달려온 나는, 주류로 떠오른 문화에 반감을 갖는 습성이 있다. 이제 만성으로 발전된 이 병마를 안고 사는 것은 녹록지가 않다. 첨에는 남들과 다르고 싶은 중2적인 자발성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젠 의지와 상관없이 주류와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이 입고 있던 옷에는 손이 가질 않고, 남이 추천한 노래는 보관함에서 먼지만 쌓여 간다. 이처럼 힙합도 같은 이유에서 내 취향 레이더를 벗어난 모양이었다. '쇼미더머니' 시리즈의 성공과 함께 주류 문화로 떠오른 힙합은, 홍대병에 지배를 받는 내게는 흥미롭지 않았다.




모순적이지만, 난 힙합 경연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평소에 돈과 화려한 삶을 자랑하는 가사만 열심히 써대던 사람도, 그 자리에서 서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흥미롭다. 짧은 시간 동안 무대를 준비하고 새로움을 매번 보여줘야 하는 경연 프로그램의 특성상, 매번 자기 자랑을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밑바닥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것을 보여주는 사람은 경연에 남는다. 타성에 젖는 사람은 떠난다. 간단한 논리이지만, 공연자들의 일상을 갈아 넣음으로써 완성되는 논리이기도 하다. 아티스트들이 공연을 준비하는 고통을 매주 느끼긴 하겠지만, 그 덕에 그들이 내놓는 음악과 공연은 맛이 깊다. 만드는 이들은 고통스럽겠지만, 지켜보는 나는 황홀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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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een Shot 2021-03-22 at 1.14.42 PM.png Mnet 유튜브 채널, 고등 래퍼 4 1:1 주제 배틀 중에서




눈치챈 독자도 있겠지만, 글의 제목은 현재 방영 중인 '고등래퍼 4'의 출현자인 이상재 학생의 가사이다. 집이 가난하지만 음악이 하고 싶어 상경했다던, 부족한 생활비 때문에 며칠간 굶기도 했었다고 했다. 집안 형편에 도움도 되지 못하는데, 오히려 생활비를 받아 쓰는 상황의 부담이 가사에 고스란히 담겼다. 고등학생에게서 엄마가 보내주는 돈이 무섭다는 가사가 나오다니. 안타까웠다. 그리고 동시에, 내 삶의 지점에서 공감했다. 비단 나뿐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같은 대목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영상 댓글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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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een Shot 2021-03-21 at 10.08.14 PM.png 해당 영상에 달린 댓글들







입금보다 출금 내역이 많은 내 통장에 수년간 우직하게 자리를 지켜온 입금자가 있다. 어쩌다 한 번 잊는 일도 없이, 매달 1일이 되면 입금 내역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나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이름이 담긴 입금 알림이 울리면 복잡한 감정이 든다. 몸은 이미 다 자랐고, 나이는 쌓여가지만 부모님의 계좌에 있던 돈을 받는다는 것. 아무리 학생 신분이라고 해도 작아지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당장 독립을 할 용기를 내지도 못한다. 하여, '다음에, 돈을 벌면, 자리 잡으면' 같은 단어로 부끄러움을 조금 희석하고, 그 돈을 받아 든다. 그렇게 매달 내 위치를 발견하고, 작아짐을 느끼는 의식을 치른다.




다음을 기약하는 단어들은 당장의 부끄러움을 희석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다가올 미에 대한 두려움까지 숨겨주지는 못한다. 극도로 불투명한 지금의 시기를 지나며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혹은 어떤 구실을 해내야 할지를 고민하다 보면, 항상 최악의 미래를 상상하는 데에 이른다. 그건 지금까지 내 삶을 지탱해 준 이들에게 보답하지 못하게 된 모습이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은 수익을 기다리는 투자자와 같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런 모습을 입고 있으면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질 것 같아 두려워진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에 짐이 될지 모른다는, 어찌 보면 보잘것없는 걱정이 내겐 참 크게 다가온다.




매달 들어오는 용돈에 부담 뒤에, 종종 아찔한 감정이 따라붙기도 한다.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부모님의 도움이 미안해지는 시기까지 다다랐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과 보낼 순간들이 지금까지처럼 빠르게 지나고 나면, 영이별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는 생각에 낭떠러지를 마주한 느낌이 든다. 또 아찔함이 지나가고 나면, 그들의 삶에 기생한 것 같아 미안하고 짠한 감정이 든다. 이런 상태에 마음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꼭 미술 시간에 여러 색의 물감이 거쳐간 물통이 떠오른다. 검은색인지 아니면 다른 이름일지 모르는 색으로 혼란한 물통. 내 부족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색깔의 감정을 살펴보면 내가 그 물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내, 그 탁한 색에 질색하고 눈을 돌린다.




우연히 만난 '지금은 엄마가 보내주는 돈이 무서워.'라는 가사가 와닿아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만큼이나 늘어놓았지만, 아직 표현하지 못한 감정적 영역이 있는 듯하다. 그게 어린 눈으로 보았던 어른의 이미지와 지금의 모습의 간극에서 나온 괴리감인지, 독립을 코앞에 둔 나이에 으레 느끼는 불안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더 파고 들어가지는 않으려 한다. 그게 어떤 감정이든, 소중한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고 의미 있기 때문이다.




탁한 물통을 휘저어보며, 이제 내가 '보살핌 소비자'에서 '보살핌 생산자'로 넘어갈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음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당연하게 도움을 받던 어린 시절은 지나고, 도움을 당연하게 여김이 부끄러워지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나는 이제까지 성장해왔고, 내일 더 굳건해져야 한다. 내가 생각했던 어른의 이미지는 내게서 평생 만나볼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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