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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연 Jan 07. 2022

EP1. 소개, 옳다는 것, 이해

이제 조금은, 누그러졌으면 해서.

1. 프로젝트 소개


        살며 걸어갈 길을 다 알고 가는 사람은 없다고들 말한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삶의 경로를 A부터 Z까지 알진 못해도 우선 어느 방향으로 떠날지는 알아야지, 생각했다. 어차피 어느 길을 선택하더라도, 초심자의 행운에서 오는 기쁨이 지나면 이 악물고 버텨야 하는 사막이 온다. 그러나 그 사막을 걸어갈 원동력은 첫 기쁨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찾고 싶었다. 어느 방향에서 초심자의 행운을 만날 수 있을지.


        끝내 첫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 학교에서 뛰쳐나왔을 때부터, 잔뜩 엉킨 생각들을 들고 군대에 들어갔을 때, 그리고 그 순간이 모두 지나간 지금까지도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있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나를 사막으로 인도할 첫 기쁨을 찾았다. 블로그를 운영해보기도 했고, 전공을 살려 여러 프로젝트를 해보기도 했으며, 재테크에 매달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막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여, 첫 기쁨을 찾고자 했던 그 자리로 계속 돌아왔다.


        셀 수 없는 시작점으로의 회기 속에서, 나는 다짐했다. 자기 길을 척척 찾는 사람들이 미칠 듯 부럽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그렇게 마치 신께 드려질 제물을 손질하듯이, 매일을 정성스레 닦고 가꾸어보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의 여러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면서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글을 쓰는 일이었다. 그래서 매일 조금이라도 읽고 쓰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자리를 우직하게 지키다 보면, 고기가 잡히지 않아도 자리를 지키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처럼, 내게도 그리하시지 않을까 해서.


        그러나 내가 다짐했던, 우직한 삶으로 향함을 막는 장벽이 있었다. 매일 긴 글을 완결해서 올려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매일 3000자(내 생각에 여기 올리기에 적당히 긴 길이인가 보다) 가까운 글을 쓸 만한 중심 생각을 매일 하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그 몇에 들어가기에 나는 너무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 장벽을 허물고자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름은 조각보 프로젝트라 하면 좋겠다. 하나의 긴 글로 쓰기는 작은 조각 글들을 모아, 하나의 멋진 보자기 글을 만들자는 의미이다. 가볍게 시작할 수 있고, 지속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닐지. 기대가 된다.




2. 옳다는 것

2017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p.38 | 작가 노트 중에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당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분노한다. 인터넷에서 '누가 그렇다더라, 누가 그랬다더라' 하고 건네 들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정의가 사라진 것만 같은 현실을 마주했다고 '생각할' 때, 특히 더. 그러나 순간 분노하면 그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려 하는 노력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그 고결하고 도덕적인 눈을 바삐 움직이면서, 미디어 이쪽저쪽을 헤매고 다닌다. 마치 화를 표출할 곳을 물색하는 것 같다. 댓글에서 타인을 재단하는 논객들은 항상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도덕적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주장은 항상 맞다. 댓글에서 그런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조금 무섭고, 그들이 크게 느껴진다. 내게 가하는 비판이 아니라서 이 정도이지, 만약 그 화살이 내게 날아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무서운 데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 같다. 악플을 다는 사람들을 직접 보면 덜 무서워질까 해서,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선처해주던 어느 드라마 속 인물이 슬프게도 이해가 된다.


        그건 정말 뭐였을까. 자신을 그토록 옳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그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걸까. 그토록 옳은 사람들만 모인, 군중의 분노는 모든 곳을 향한다. 한 곳만 빼고. 바로 자기 자신. 그렇다, 결국 자신만 아니면 되는 것이었다. 삶에서 좌절된 욕구에 대한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화가 났으니 화가 난 이유를 찾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눈을 바삐 움직여 공격해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들을 물색하고 있는 거겠지. 예를 들면 범죄자, 정치인, 연예인. 일단 화가 났는데, 그 원인으로 선정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사람들 아닌가. 정말 뭐였을까. 자신의 말은 한 없이 맞고, 반면에 타인의 말은 한낱 헛소리에 불과하도록 만든 것은. 그토록 자신을 옳은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은.




3. 이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p.67 | 현대 물리학의 '이해'라는 개념


        양자역학의 개척자 중 하나로 인정받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본격적으로 원자물리학 연구에 빠져 들기 전에 '과학에 있어서의 이해'라는 것에 질문을 던진다. 물리 현상을 수식으로 계산해 표현한 결과가 정말 그 현상을 이해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수식 속에 있는 변수들을 조작하면서 나타나는 변화만을 관찰하는 것이 진정한 이해가 맞을지 불안했던 것 같다.


        함께 대화를 하던 볼프강 파울리도 하이젠베르크의 이 불안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이해'를 설명했다. 이전에 설명되지 않던 다수의 현상(뉴턴에게 떨어진 사과와 같은 현상)들이 모여서 이를 포괄할 수 있는 법칙 같은 것을 도출할 수 있는데, 이때 이 법칙이 수식으로 설명이 되면 '이해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출된 법칙이 어느 지점에서 서로 맞닿을 때, 그 법칙을 이해했다는 감각이 생긴다는 게 말의 요지였다. 여러 시선들을 통해 나온 결론이 한 방향을 가리켰을 때, 우리가 그 현상을 이해했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상뿐만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것도 이와 같을 거라 이야기하고 싶다. 한 가지 시선으로만 사람을 바라보고 그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태롭다.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여러 가지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시도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이해하도록 해줄 테니까. 우리는 팩트가 본질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행동을 한 것은 팩트니까, 너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너무 쉽게 단정 짓는다. 진정한 의미의 이해에는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했으면서, 전부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을까. 서로 이해하고자 하면 우리에게 분노가 조금은 사라질 텐데. 분노는 사그라들고, 여러 시선으로 사람을 조망했으면 좋겠다. 이제 우리가 조금은, 누그러졌으면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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