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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연 Jan 12. 2022

EP2. 돈 룩 업(2021)

(스포 포함) 이제는 죽음보다도 '중요한' 것들이 생기고 있다

1.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태복음 24장 38-39절



        죽는다는데, 6개월 뒤면. 그것도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가 단번에. 6개월 뒤면 에베레스트 산 만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해서 모두가 멸종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사태를 예견한 과학자 셋 이외에는 아무도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질 않는다. 대통령은 중간 선거 지지율에만 정신이 팔려 있고, 방송 패널들은 과학자의 말이 아닌 외모와 가십으로 시청률만 높이려 하며, 기자들은 그들 사이에서 자극적인 기사들을 쏟아낸다. 결국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는 온전히 전해지지 못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며 대홍수가 닥칠 것이라 이야기하자 모두 비웃던 그때처럼, 사람들은 변죽만 울렸다. 그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아무 일 없을 것처럼 먹고 마시고, 또 장가 들고 시집 가던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SNS 속 삶을 즐기며, 정치적 신념을 따르며 각자의 삶에 매몰되어 있었다. 방주 사건 이후 몇천 년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삶에만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을 노리는 것은, 본질을 교묘히 왜곡하여 새로운 프로파간다를 만들어내는 무리들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혜성이 보일 정도가 되었을 때에, 선동하는 무리들과 그들에게 무력하게 속는 대중은 훨씬 더 극적으로 마음에 다가왔다. 그냥 고개를 들어 위를 보라고 외치는 과학자들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절대 위를 보지 말라는 정치인과 기업인.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대중의 모습. 대중이 속임수와 프로파간다가 본질과 달랐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에는 너무 늦었다. 그제야 군중이 할 수 있는 것은 공포에 잠식되어 폭동을 일으키고, 술을 마시고 난교하는 것뿐이었다. 그게 아니면, 조금이나마 더 살아보겠다고 마트의 물품들을 털어가거나, 땅을 파고 숨겠다고 수십만 원까지 값이 치솟은 삽을 구매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2.

        사태가 여기까지 오도록 사람들의 눈을 가렸던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 깊숙이 자리 잡은 추천 알고리즘이었다. 영화 속 사람들은 한 거대기업의 인공지능이 탑재된 핸드폰을 사용한다. 기분을 파악해서 위로해주고 정신과 상담 예약도 잡아주는 신통한 핸드폰이었다. 알아서 관심사를 파악하고, 해야 할 행동을 추천해주니 사람들은 사유할 필요가 없다. 자신에게 꼭 맞추어진 옷을 입었을 때처럼, 불평이나 비판도 의미가 없다. 이미 편한 옷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서비스를 만들어낸 사람은, 사람들과 눈도 맞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연설에서 어릴 적 자신을 위로하고 이해해줄 친구가 절실해서 이것들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수동적인 인간관계를 방치한 나약한 개인이 자신의 피조물을 통해 사람들에게 수동적인 면모를 새겨 넣고 있었다.



        또한 알고리즘은 눈을 가릴 뿐만 아니라 군중을 마비시키고 있었다.(영화 속 군중들의 마비된 면모들이 크게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목도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흔히 알려져 있다시피, 알고리즘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들을 더 많이 노출시킨다. 사람들은 무겁고 불쾌한 이야기보다는 가볍고 유쾌한 것을 더 선호한다. 지구가 멸망한다는 이야기보단 연예인의 사랑 이야기에 손이 가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인간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며, 두려움은 진실을 외면하게 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우리의 건강 검진 결과는 항상 예상보다 나쁜 것이 아닌가. 그게 인간이니까, 가볍고 유쾌한 것에 더 손이 가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그래서 추천 알고리즘이 가볍고 유쾌한 컨텐츠를 퍼 나를 확률이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유쾌하고 매력적인 것들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제 날카로운 현실을 외면하게 되는 듯하다. 점차 불편한 메시지와 유쾌하지 않은 어조의 대화는 배척당한다. 세련되고 유쾌하지 못한 담론을 제시하는 사람은 꼰대고, 그들의 이야기는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다. 극 중 과학자가 절규하며 이야기했듯이, 모든 대화를 유쾌하고 매력적으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비된 군중의 마음속에 이 말은 가닿지 못했다. 이야기 속 사람들은 그 절규가 매체 훈련이 덜 된 출연자의 발악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삶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3.


        노아의 이야기와 다르게, 먼저 지구의 멸망을 예견하고 같이 살자고 외치던 이들은 방주에 타지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함께 요리를 하고, 가족 같이 식사를 하며 소박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참 많은 것들을 좇아 살아가는 인간의 인생이지만, 예정된 죽음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소중하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추억을 나누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마지막은 없었다.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과 냉동 캡슐이 달린 방주에 탑승한 엘리트층이 공허하게 대비된다. 기도조차 물질을 얻는 것으로 가득 찬 인생을, 조금이나마 더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그 모습이. 2만 년 동안 얼어붙어서는 겨우 알고리즘이 예견했던 대로 브론테록에 잡아 먹힐 거면서.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알고리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거면서. 물리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방주에 탑승한 사람이지만, 알고리즘이 만들어가는 세상을 깨고 운명을 개척해나간 사람들은, 담담히 죽음을 택한 과학자들과 그 가족이었다. 어느 쪽이 더 존엄한 인생이었을지.





4.

        그 큰 재앙 앞에서 인간은 한 없이 작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결연하지만 두려운 표정으로 '어두운 시기를 사랑으로 위로하고, 담대함으로 이 두려운 시기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면서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깨닫는 것이었다. 참으로 부족했던 것 없던 우리네들 인생이었다고. 염려했던 것보다 채워져 있었고, 그래도 충만한 인생이었다고, 입으로 시인하게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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