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안으며
목놓아 우는 그의 어깨를 두 팔로 받아들이면서, 문득 내가 아무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에게 팔을 벌렸던 이유는 마땅히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자라기까지, 방법이 어땠든 그는 내 옆에 서 있었다. 오롯이 내 삶의 무게까지 지탱하면서. 그런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아무리 나여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건 사랑도 동정도 아닌 의무감에서 한 일이었다. 한겨울 주차장 한복판에서 우는 아버지를 안고 느낀 게 겨우 의무감이라니. 비참했다.
사실 나는 내 감정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가족모임에서, 그리고 영화와 음악을 마주하면서도 활짝 웃거나 목 놓아 운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내 감정이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혹은, 크면서 어린애가 점잖다는 말이 칭찬이 아님을 몰랐기 때문일까.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나의 감정은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꺼져가고 있었다.
오래전 가족 여행 때의 일이다. 발코니에 나간 형이 문이 잠겨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내가 문 앞에 있었다. 나를 발견한 형은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다. 열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어린 나에게 처음 보는 형태의 잠금장치를 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난기가 동한 아버지는 형의 반응을 보면서 약을 올렸다. 형은 계속해서 소리쳤지만, 소리는 유리에 막혀 입을 크게 벌리는 아기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황한 나와 소리치는 형. 그리고 그 둘을 놀리는 아버지가 담긴 풍경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갇힌 이의 목소리는 그 벽에 막혀 전해지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벌려대는 입의 절박함을 대부분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솔직히 말하면,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또,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피로감과 부담을 느낀다. 난 이런 사실을 직시하고도 사람들에게 내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건 ‘나는 다를 거야, 내 관계는 다를 거야.’라는 미련함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본 나는 적잖이 놀랐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게 그 상황이 닥치니 느낌이 달랐다. 나는 소리치는 갇힌 사람이었다. 들리지 않는 외침은 타인에게 소음이었고, 부담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이해하려 하지만 이내 실패한 사람의 당황스러움이 스치는 미소. 그리고 내 말이 어렴풋이 다가오지만 더 이상 파헤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의 공허한 얼굴이다. 이런 반응을 받아 든 내게 선택지는 유일했다. 이런 불편한 얘기 대신에, 소셜 네트워크나 영화, 드라마 얘기를 꺼내는 빈도를 높이고, 나를 이해하고 감당할 사람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모두가 즐거울 수 있었다. 갇혀 있는 나만 제외하면.
커버 사진 - Jonah Brow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