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 ) 추천은 부담이었다.

나는 정말 좋아서 알려준 건데.

by 김종연

음악 플레이어에서 가장 많이 누르는 버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고민도 없이 '스킵'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삼각형 두 개가 붙어 공격적으로 오른쪽을 가리키는 모양을 한 것. 어제 좋았던 음악도 오늘은 식상하거나 거슬리는 변덕쟁이에게, 이 공격적인 것은 자꾸만 손이 가는 새우깡 같은 존재이다.




자꾸만 스킵 버튼을 누르는 것이 내 변덕 때문만은 아니다. 친구들이 정말 좋다고 추천해서 들어 본 음악들이 내 보관함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취향이 아니라고 묻어 둔 음악이 다수 있었다. 듣지 않는 음악을 정리하면 되지 않냐고? 수천 가지나 되는 보관함에서, 듣지 않는 음악을 지우는 일은 시간이 많이 든다. 의미 없는 단순 노동을 위해, 나의 시간을 통으로 투자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할부를 선택했다. 만날 때마다 화면을 켜고 넘기기로 한 것이다. (요새는 세상이 좋아져서 귀에 꽂힌 이어폰을 두 번 빠르게 누르면 다음으로 넘어간다. 놀랍지 않은가. 공격적인 것을 마주하지 않아도 다음을 도모할 수 있다니. 내겐 큰 선물이다.)




그날도 낯선 노래가 들리자마자 스킵 버튼을 떠올렸다. 화면을 켜니 친구가 데뷔 때부터 좋아한다던 가수의 이름이 떴다. 그 가수의 노래는 그간 나의 취향에서 벗어났으니,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버튼에 손을 올리다가 그 상태로 끝까지 들어버렸다. 가사도, 멜로디도 아닌 무언가에 이끌렸던 것 같다. 그리고 무언가 깨달은 기분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려고 한다.



듣던 음악이 좋아서, 보던 영화가 긴 여운을 남겨서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좋은 콘텐츠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고 싶은 탁월함을 마주한 기분 좋은 시기심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런 일종의 혼란 상태에 확실한 게 있을 리 없지만, 필연이라고 부를 일이 한 가지 정도는 있다. 바로, 내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움직이리라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평론을 해보거나, 전화기를 집어 이 작업물을 추천하는 일.



평론을 적는 일은 용기를 쉽게 낼 수 없는 작업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평가하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쓰는 이의 깊이를 보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각도로 바라보고, 그 시선을 기반으로 기준을 세우고 설명하는 것은 내 속을 날 것으로 보여주는 기분을 준다. 물을 들여다볼 때 원래의 깊이보다 얕아 보이는 것처럼, 글로 드러나는 깊이는 그 주인의 깊이를 축소하여 드러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에 신경이 쓰이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왜 이렇게 설명이 길어지는지 궁금해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차피 하고 싶은 이야기는 뒤에 있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을 빙빙 돌리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용기 낼 수 없다는 핑계 뒤에 숨은 내 나태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조금 돌려서 얘기했다. 맞다. 복잡함이 찾아올 때마다 글을 써내기엔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든다. 한 마디로 하자면, 귀찮다.



자신의 나태함을 마주한 당혹감을 희석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나를 움직인 작업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이기 위해서 전화기를 집는다. 손에 들린 기계로 방금 접한 콘텐츠를 함께 좋아할 만한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사실 당혹감의 희석이라느니, 예의라느니 하는 거창한 이유에서 하는 행동은 아니다. 그저 내가 느낀 전율을 알려주고 싶으면서도, 나의 취향을 영화나 음악에 대입해 뽐내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내가 조금 멋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작품이 주는 희열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나 보다. 그게 아니면, 이 지구 상에 나와 비슷한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양한 생각의 존재를 사랑하면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외로운 불안함을 잠시라도 지우고 싶은 마음이랄까. 모순적이다.



때때로, 아니 거의 대부분 이런 불안함은 해소되지 않는다. "재밌겠다. 시간 되면 (읽어, 들어, 찾아) 볼게."와 같은 답변에 불안은 이내 실망으로 바뀐다. 나도 상대의 비슷한 접선 요청에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실망을 짜증으로 확대하지는 못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내가 느낀 것과 정확히 같은 전율을 느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창작물이 주는 전율은 그 당시의 상황과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마주한 상황은, 과거의 내가 했던 선택들이 모여서 낸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내가 하는 선택은 나의 성향과 경험, 주위 사람의 조언으로부터 나온다. 성향, 경험, 주위 사람은 나의 성장 배경이자 현재이다. 이 모든 것을 충족하는 인물은 세상에 단 한 명이다. 나 자신. 그만큼 확률이 너무 희박하다. 이 조건의 타인이 존재할 수 있다는 희박하고도 절망적인 확률에 기대하기에는, 세상에 실망할 일이 너무나 많다.



따라서 내가 느낀 전율을 상대가 느끼는 경우는 적을 수밖에 없다. 둘 다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도 지금 상대가 숲의 포근함을 느끼는지, 혹은 바다의 청량함을 즐기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지나는 풍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비슷한 풍경을 지나는 사람 정도 돼야 내가 추천한 작품을 열어서 경험해보기라도 한다.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관심을 가지는 포인트도 비슷하다.




예전에는 '지금, 내가 보는 앞에서' 상대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좋은 상황도 있었지만, 대개 상대는 부담스러워하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나는 미안하면서도 서운해지는 불편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추천'하는 일의 양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추천을 하고 지금 봐야 한다는 압박을 주기보다는, 그 사람의 생활에 붙여 놓는 편이다. 부담 없이 여행 가방에 들어 함께할 방법을 고민한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 사람에게 와 닿을 날이 올 것만 같아서. 언젠가 그가 나와 같은 풍경에 들어섰을 때, 그리고 문득 풍경 속의 자신이 혼자라고 느껴져 외로울 때, 먼저 이 곳을 지나고 같은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 있었노라고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건,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담겨 있던 친구의 음악처럼, 조용히 빛나는 기억으로 미래의 상대와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다.




커버 사진 - Namroud Gorgui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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