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주의가 절대성을 띄어가는 오늘에 대하여.
제목이 조금 자극적이긴 하지만, 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다. 가해자 없이 피해자만 난무하는 세태 속에서, 가끔 아니 자주, 내겐 상대주의가 무섭게 다가온다. 어릴 적 역사 교과서에서 보던 사나운 얼굴을 한 절대적인 인물들의 표정이 떠올라서. 근엄한 얼굴을 한 절대성이, 상대주의의 토대에도 싹트고 있는 것 같아서.
최근 잠깐 시니컬해지고 싶어서 읽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인상 깊게 마주한 인물이 있다. 현명하지만 침묵하는 당나귀 벤저민이나 히틀러의 선전부 장관 괴벨스가 떠오르는 교활한 스퀼러도 인상 깊었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대상은 아니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는 '복서'이다. 동물 농장의 그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 말(동물의 종류)인 복서는 두 가지 신조를 지키며 살아간다. '나는 이곳의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와 '나폴레옹 동무는 항상 옳다.' 작중에선 성실하지만 우둔하게 그려지는 이 동물은, 열심히 살고자 하는 나와 당신의 모습과 어딘가 닮아 있다. 그래서 왠지 불편하고, 또 마음이 가는 캐릭터이다.
동물농장이 비판하는 소련의 기만과 위선은 이제 실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득을 노리는 세력들의 의도와 계략이 한 데 어우러져 (쉽게 드러나지는 않으나) 지금 시대도 어떤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이는 나의 편협한 견해이므로, 음모론이라고 욕하고, 나 또한 어떤 세력에 속한 기만자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당신의 자유다. 마음껏 하시라. 하지만, 일단 이야기가 궁금해 이곳에 들어왔을 테니, 내 견해에 대한 평가는 잠시 보류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편협한 전제처럼, 세상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경향성을 가진다면, 그 움직임의 추진력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인물들이 제공한다. 이 글에서 만난 나와 당신은 이 축에 속한다. (열심히 살기 싫은 인물들은 타인의 글을 읽을 마음의 여유조차 없다.) 우리는, 저마다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이유가 있다. 명시하지 않을 뿐, 암묵적으로는 알고 있다. 이를테면, 타인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어렴풋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 혹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유야 어떻든, 우리 사회에서 열심은 미덕이었다. 누군가 '열심히 살고 있어.'라고 말하면, '잘됐다, 좋다.'로 답하지 '왜 그랬어, 무슨 일이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의심이 없는 열심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기도 한다. 책에서 복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주위의 경탄도 얻어내지만, 그의 열심은 결국 나폴레옹을 비롯한 지배층들의 배를 불리는 데에 이용된다. 남들보다 열심히 하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일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익을 위해 소모되는 부품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쓸모가 다했을 때, 그는 다른 부품으로 대체되기 위해 도살당한다.「동물농장」은 극적으로 과장된 우화이지만, 열심히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모습을 글로 접하고 있다면, 어딘가, 좀, 슬프다. 나도 누군가의 욕심을 열심히 끌고 나아가는 순진한 복서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아서.
모두가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열심을 쏟는다. 복서도 그랬다. 그의 두 번째 신조, '나폴레옹 동무는 항상 옳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정의는 나폴레옹 그 자체였다. 농장의 번영을 이끌 주체로 등장한 나폴레옹을, 복서를 포함한 농장 주민들은 열렬히 지지한다. 자신의 농장을 부유하게 할 거라는 믿음은 농장에서 인간을 몰아낼 때에 느낀 정의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초기에 순수했던 의도와 열정이 특정 대상에게 향하는 상황에서 발견되는 군상의 모습과 같다.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는 지도자는 정의이며 진리인 위치를 차지한다. 자연스럽게도, 그는 독재자가 된다. 스스로를 압제하는 존재를 직접 만드는 아이러니는 낯설지 않다.
그래서 '가장 정의롭다 느낄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 모양이다. 가장 이용당하기 쉬운 마음이 정의감이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자신은 정의의 편인데 주위에도 동조하는 사람밖에 없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는 인터넷 세상에서 충분히 목도했다. 명백하게 죄인인 것 같았던 공인이 누명을 썼을 때, 수도 없이 달리던 악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낮은 확률로 결백이 드러나면서 느꼈던 부끄러움도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는 이를 경험했고, 그 속에서 배웠다. 명백하게 내가 옳은 상황이 있다면, 아무도 호도하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의심하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도. 우리는 배웠다.
의심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정의'가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가지를 뻗어나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의심해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재생산하는 가치를 쉬이 정의로 받아들이다간 그 사상의 부품이 된다. 감성과 이성을 능숙하게 오가며 마음을 움직이는 누군가의 연설과 글도 의심하자. 지금 당신이 읽는 이 글마저도 의심하자.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먼 길을 돌아왔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서로를 죽이는 시대를 지나, 그 압제를 견뎌온 인류가 만들어낸 것이 상대주의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런 상대주의가 다시 서로를 옭아매고 있다.
열심히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 의해 상대주의가 절대성을 얻어간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모두가 옳다고 믿는 세상에 살아가는데, 왜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파렴치한이 되는 것일까. 열심히 어떤 사상을 쫓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고? 외부의 적을 상정하고, 절대 악으로 표현되는 반대편에 대항하는 것만이 목표라고 느끼도록 하는 일들이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가? '멸공, 북괴'등의 단어가 일상어처럼 오가던 6-70년대가 그랬고,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20세기 초가 그랬다. 그리고 그 시대를 이끌어 온 주역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선한 의도와 열정을 가졌던 나와 당신 같은 사람이었다. 아이히만은 멀리에 있지 않다. 의심하지 않는 우리 가운데에 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자. 그것이 상대주의의 진정한 토대 이리라 생각한다.
커버 사진 - Shraddha Agrawal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