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변태는 아닙니다.

by 김종연

아무도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를 테면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언제 식물이 살았는지도 가늠할 수 없는 화분, 어쩌다 눈을 마주치면 ‘여기다 이런 걸 버려놨어.’ 하고 미간을 찌푸리는 '사소했던' 것들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을 마주치면, 카메라를 들고 찍는 버릇이 생겼다.




요즘 사람들은 신경 쓸 것이 너무 많다. 삶을 편하게 해준다던 것들이 여기좀 봐 달라며 울려대는 통에, 또 단축된 시간만큼 채울 것이 많아진 탓에, 온종일 연결되는 것에만 집중해도 하루가 모자라다. 나도 그런 ‘요즘 사람’들의 삶을 살아간다. 마음에 드는 것들을 만날 때마다 구독을 해댄 탓에, ‘이거 보세요, 저거 보세요. 이거 재밌다니까.’ 하는 메시지가 사람이 울리는 알림과 맞먹을 정도이니까. 세상을 연결하자는 미명 하에 발전한 인터넷이다. 하지만 그 미명에 복종하다가 하루가 다하는 경우가 많다. 아, 내겐 귀 기울일 목소리가 너무 많다.




우리의 머리에 랜선이 하나씩 연결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득한 어느 날이었다. 이 날은 아마 ‘아, 걷고 싶다.’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던 날이었을 것이다.(‘아, 걷고 싶다.’가 어색하다면 내 브런치로 들어가 걷기를 2500자에 걸쳐 열심히 홍보한 글을 읽어 보기 바란다. 이해할 필요도 없는 타인=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가자.) 정처 없이 골목길들을 누비며 걷다, 익숙한데 낯선 동네에 들어섰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등하교길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수천 번도 더 지났던 길인데, 낯설었다. 물론 ‘재계발 환영!’ 나 ‘재계발 결사반대!’처럼 공격적으로 소리치는 현수막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걸려 있어서, 언젠간 재계발이 되겠구나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달랐다. 졸업 후에 마주한 익숙한 공간의 낯선 풍경이었다. 사람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쓸쓸했다. 오히려 현수막으로 싸우던 시기가 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의 집이었던 건물이 버려져 철거될 시기만 기다리다니. 나는 여기서 서서 그걸 지켜보는 관객으로 존재하다니. 쓸쓸하기도, 굴욕적이기도 한 기분을 느끼며 카메라를 들었다. 이 버려진 것들이 치워지고 나면, 더 이상 이 동네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서.




그때부터였다. 버려진 것들에게 알게 모르게 마음이 쓰인 것은. 원래 주인과 함께 호흡하고 닮아가던 물건이 ‘낡았다’는 표현을 뒤집어쓰고 길거리에 나뒹구는 모습을 보면, 카메라를 들었다. 예쁜 것들 찍기도 아까운 시간과 공간이라지만, 그렇게 허비하고 싶었다. 이런 허비 채워진 사진첩은, 예쁜 것만 담긴 것들보다 아름답고 의미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사진첩을 처음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이런 걸 찍어서 왜 저장씩이나 해놓냐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물을 때마다, 나는 이런 물음을 속으로 던졌다.



‘사람들은 왜 버려진 것들을 불편해할까.’




이 질문을 하다 보면, 그 꼬리를 물고 다음과 같은 질문도 나타났다. 어쩌면, 사람들은 버려진 것들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애써 외면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같은 생각들.




조금 솔직해지자면, 질문들 속의 ‘사람들’은 나였다. 버려진 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을 피하고 싶은 욕망이 느껴졌다. 은연중에 쓸모가 없어지면 나도 버려질 거라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함께 호흡하며 닮아가던 대상에게 외면당하는 저들처럼. 혹은, 생명보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간으로서 느끼는 나약함에서 오는 두려움일 수도 있겠다. 이 감정들을 ‘심난함’이라는 불완전한 인간의 단어로 표현하는 나도, 참 나약하다.




볼 때마다 나를 울게 하는 영화가 있다. 토이스토리 시리즈다. (TMI. 내게 토이스토리는 3편이 마지막이었다. 4편도 봤지만, 잊었다. 내겐 모욕이었다. 1편을 보기 시작하면 3편까지 꼭 마무리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악당, 주인공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있다. 두려움이다.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쓸모 없어지고 매력적을 잃는다면, 아무도 모르게 버려져 쓰레기장을 전전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딘지 우리의 두려움과 닮아 있다. 장난감들에서 나를 발견한 순간, 디즈니는 시청료로 내 눈물을 뺏어가고야 만다.




나의 약함과 쓸쓸함을 마주하게 하지만, 이 영화를 매번 찾는 이유가 있다. 결국엔 아무 이유 없이도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존재가 있음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친구, 가족, 그게 아니라도, 잊혀 가는 것들을 바라봐 주는 나 같은 사람이 어딘가에 또 있을 거라는, 그런 희망을 놓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커버 사진 - 아이폰 카메라, 2020년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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