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아직 더위가 한창인데 때 이른 코스모스는 추억을 열어주듯 군데군데 피어있다. 군대 간 아들이 휴가를 나온다고 해서 역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가을이 되면 기차역 주변에는 어김없이 코스모스가 피었는데, 바람에 살랑이는 코스모스의 연분홍 꽃잎들은 기차의 기적 소리와 어우러져 잔잔한 풍경을 만들었다. 나에게 이 풍경은 단순한 가을의 장면을 넘어, 지나간 시간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특별한 순간이다.
코스모스가 피는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여행한 적이 있다. 코스모스 길은 목적지로 가는 수단이 아니라, 설렘을 가득 담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특히 가을철이 되면 창밖에 펼쳐지는 코스모스 길이 나를 가장 기쁘게 했다.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며 보이는 코스모스들은 마치 나를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코스모스에 특별한 마음을 가지는 이는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딸도 코스모스를 좋아해서, 베란다 화분 한쪽에 코스모스 씨앗을 심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연분홍 꽃을 보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씨앗이 싹으로 자라서 화분을 가득 채웠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 못 할 정도였다. 그런데 가는 줄기만 뻗어 올라갈 뿐 줄기에 살이 오르지 않았다. 결국 힘없이 축 늘어져서는 말라 죽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코스모스는 척박한 땅에서 비, 바람을 맞아야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모양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온실 속에 곱게 자란 사람보다 힘든 유년 시절을 겪고 우뚝 선 사람에게 더 정이 간다.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리고 아들이 탄 기차가 역으로 들어왔다. 나라를 위해 막중한 짐을 지고 있지만 늘 바깥 세상이 그립다는 아들이다. 처음 아들을 군대에 보낼 때는 부모의 마음이 다들 그렇겠지만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쓰였다.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유를 억압받는 곳이 군 생활이 아니던가, 편안하지 않고 마음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곳이라 혹시나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게 생활할까, 노심초사했던 일들이 떠 올랐다. 전화 한 통에 같이 울고 웃었던 날들이 지나고 이제는 말년 병장 배지를 달고 마지막 휴가를 나오는 길이니, 시간이 참 빨리도 흘렀다. 당연히 아들에게는 느리게만 흐르는 시간일 테지만 말이다.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은 것 같다. 아들이 가는 길이 힘들지 않고 코스모스가 핀 꽃 길만 걷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 그러나 척박한 땅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코스모스처럼 젊은 날 아들도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서 어떤 위기가 와도 유연하게 대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들을 태우고 달리다가 코스모스가 핀 도롯가에 잠시 차를 세웠다. 아들의 표정이 왜? 하고 묻는다. 코스모스 꽃잎을 꺾어서 게임을 하자고 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잎을 가장 빨리 떨어뜨리는 사람이 이기고 진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사자는 내기를 제안했다. 아들은 곧 뜬금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동화 작가인 엄마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며 빙그레 웃는다. 결국 내기에서 아들이 이겼고 내가 동네 편의점에서 아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코스모스가 핀 골목에서는 무엇을 하든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연분홍의 코스모스가 충분히 추억을 담을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제 곧 완연한 가을이 될 것이다. 코스모스도 피고 빨갛게 물든 단풍잎, 노랗게 물든 은행잎과 나뭇잎들이 세상을 색으로 채울 것이다. 요즘은 풍경을 사진에 담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와 추억을 만들어 남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문득 바람이 선선해지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