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리킬스피플
‘死亡 - 죽는다’라는 말속에는 참혹하다. 슬프다. 아프다. 불행하다. 등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 생각나면서 본능적으로 피한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들의 유전자에도 그와 같은 유전자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생물 자체의 멸종을 막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리라. 아니 그런 유전자를 가진 생물이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죽은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은 없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느낌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느낌이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보도 사진전에서 잡혀 온 적군을 현장에서 권총으로 사살하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사진의 설명에는 두 손이 뒤로 묶여 호송해 온 베트콩 간부의 즉결 처분을 위해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발사 직전이라고 되어 있다. 이 사진을 보면서 나와 내 아들은 절대로 저렇게 사살당하는 쪽보다 권총을 잡은 사살하는 쪽이 있어야 한다고 기도하고 또 기원할 것이다. 머리에 총알이 박히기 직전 얼굴을 잔뜩 찡그린 베트콩의 표정을 보면서 이 사람은 얼마나 참혹하고 아플까 그리고 그 가족은 또 얼마나 슬프고 불행할까 나는 수 십 년이 지나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총알을 맞은 당사자 입장에서는 보기보다 그렇게 참혹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아마도 순간 뜨끔하거나 쿵하는 느낌으로 끝났을 것이다. 사살한 사람은 평생 그 업보를 안고 살아야 한다. 그 기억을 지워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며 꿈에서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 어쩌면 사살당한 사람보다 더 불행하게 살 수도 있다.
나는 죽었다 살아난 경험이 있다. 죽음의 정의가 애매하긴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분명히 내가 죽었다고 했다고 했다. 대여섯 살 때 동네 형들과 동네 저수지에서 놀다 미끄러져서 물에 빠진 것이다. 그때 내 기억은 숨을 쉬기가 괴롭다는 것이다. 숨을 쉬면 코가 너무 매웠다 그렇다고 숨을 안 쉴 수도 없고 숨을 쉬면 코가 맵고, 그러다 실신했을 것이다. 일단 실신하며 고통은 없어졌다. 눈을 떠 보니 우리 집 안방이다. 동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먹을 것이 많았다. 동네 애들이 둥벙을 뱅뱅 도는 것을 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가보니 내가 물에 떠 있더라는 거다. 건져서 우리 집 마루에 거꾸로 걸쳐 놓으니 배 속인지 폐 속인지에서 물을 한없이 쏱아내더라는 거다. 숨은 멎었고 괄약근이 풀려 바지는 똥으로 범벅이 되어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물을 빼고 안방 아랫목에 뉘어 따뜻하게 하니 살았다는 거다.
이십여 년 전 치질 수술을 받고 병실에 오니 옆의 환자들은 허리에 작은 통 하나씩을 차고 있었는데 그것이 진통제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나한테는 왜 그것이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수술 후에 통증은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고통 보다 작지 않았다. 더구나 대변볼 때의 그 고통은 살면서 느껴본 고통의 최대치였다. 아마도 출산할 때의 고통이 이러할까.
사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불치병에 걸려서 겪는 고통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보다 훨씬 큰 경우가 너무 많다.
지인 중에 스티븐 호킹 박사가 걸려서 유명한 ‘루게릭병’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이 병은 발부터 시작해서 점차로 온몸이 마비되는 병인데 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의 모임인 단톡방에는 스위스에 가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기 위해 드는 비용과 절차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많다며 자기도 기회만 되면 그러고 싶다는 뜻을 호소한다.
정신과 감각은 정상인데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고통을 넘어 인간의 존엄을 의심케 하는 참담한 상황에 놓이게 할 것인데 치료될 희망은 없고 점점 상황이 나빠질 것이 뻔한데 누구나 이 상황을 별 고통 없이 끝내주기를 바랄 것이다. 사실 이렇게 생을 유지하는 것은 본인뿐만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에 부담만 가중시킬 뿐이다.
요즘 방영하는 드라마 중에 ‘매리킬즈피플’라는 것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같은 제목으로 이미 캐나다에서 방영한 것을 MBC가 리메이크한 것이라 하는데 안락사, 혹은 조력사에 관한 것이다.
배우 이보영(매리)이 이 일(킬즈 피플)을 하는 의사다. 응급의학을 하는 의사로서 많은 죽음과 그 죽음 전에 겪게 될 고통을 잘 알고 있다. 특히 불치병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유일한 치료가 진통제를 주입하는 것이고 이마저도 안 들어 엄청난 고통이 예상되는 환자에게 과연 의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기 환자에게 안락하게 죽는 약이라고 알려진 ‘벤포나비탈’을 주입한다. 환자 입장에서 이를 합법적으로 하는 방법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 안락사 법이 합법으로 알려진 나라(대표적으로 스위스)에 가서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보영은 이 절차에 드는 비용보다 저렴하게 이 일을 해 준다.
오래된 묘비에는 그 사람이 태어난 연대와 사망한 연대를 표현하면서 OOOO 년 生 OOOO 년 卒이라 되어 있다. 죽는 것을 ‘死’라고 하지 않고 ‘卒’이라고 쓴 것이다. 족보에서도 마찬가지다. 족보에 나의 아버지는 O年O月O日 生 O年O月O日 卒 의 기록이 전부다.
선조들은 죽는 것을 마치 학교를 졸업하듯 생을 졸업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입학도 축하할 일이지만 중퇴만 아니면 졸업도 축하할 일 아닌가?
테니스 클럽에 새 회원이 들어왔다. 공무원이면 은퇴할 나이에 가까운 그는 공을 강력하게 때리지는 않지만 컴퓨터처럼 빈 곳에 정확히 떨어뜨려 게임에서 좀처럼 지지 않는다. 그가 락카에서 하는 말이 바로 ‘9988234’이다. 짐작했듯이 이 뜻은 99세까지 88 하게 살다가 2,3일 아프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거다.
이 말에 동의하면서 내 생각을 보태자면 234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88은 그다음이고 99는 희망사항이다. 그런데 234가 안될 때는 어찌할 것인가? 천주교 신부님은 생사는 하느님의 뜻이므로 이보영이 하는 일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는 이를 합법화하고 있고 점차 범위를 넓혀가고 있어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나라도 스위스처럼 안락사 법이 만들어질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