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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 많은 것 중, 설거지

by 운오

사는 일의 많은 것이 그럴 것이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일의 연속. 아무리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그중에서 집안일이 으뜸이지 않을까. 아무래 일해도 끝이 보이지도 않고, 끝이 나지도 않는 일들이 줄줄이 계속 이어진다.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단장해야 하는 일은 도무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이 늘어서 있다.


차리고, 먹고, 치우고, 입고, 벗고, 빨고, 쓸고, 닦고. 단지 몇 가지만 늘어놓았을 뿐인데 참, 고단하다. 성인이 되고, 스스로를 보살펴야 할 나이가 된 후에는 대부분의 일을 직접 다 해야 한다. 돈이 많아 대신해 줄 손을 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어쩌겠는가. 직접 움직여야만 내 생활과 주변이 유지된다.


좋아하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 집안일. 많은 것 중, 설거지는 그나마 괜찮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설거지는 좀 낫다. 종종 사람들과 집안일 중 꺼려하는 일과 그나마 괜찮은 것을 나누어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각기 다른 선호도를 알 수 있다. 그럴 때면 늘 말한다. 빨래도 청소도 싫지만 설거지는 괜찮다. 꼭 해야 한다면 설거지를 하겠다. 그렇다고 스스로 설거지를 하는 데 있어 엄청난 노하우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저 꼽으라면 굳이 설거지를 고른다는 것일 뿐. 다른 것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좋아하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할 뿐이란 것엔 변함이 없으니까. 피할 수만 있다면 집안일은 꼭 피하고 싶다.


아무튼, 설거지 이야기를 하자. 그렇다. 집안일 중에서 꼽으라면 설거지를 좋아한다. 차리고, 먹은 후에 해야 할 일. 치우는 일의 마지막 구간. 뭐, 애벌설거지도 해가면서 체계적이고 꼼꼼한 설거지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물과 세제, 수세미를 가지고 하는 일반적인 설거지를 할 뿐이다. 처음엔 물로 헹구고, 세제를 묻힌 수세미로 닦고, 물로 헹구어 건조대에 늘어 두고 물기를 말린다. 물기가 다 마른 후에는 그릇을 제 자리에 정리하는 것까지. 내 설거지의 과정은 이렇게 진행된다. 설거지 과정을 적으려 생각해 보니 고작 이 몇 단계로 끝이 난다. 마른 천으로 그릇의 물기를 닦으며 정리하는 것도 아니고, 기름을 더 잘 씻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없다. 그저 열심히 여러 번 닦고 헹구는 것이 전부인 설거지. 나의 설거지는 이렇다. 뭐, 이렇다 할 것도 없는 평범한 행동들 뿐이지만 이 과정을 지나고 나면 확실하게, 의심의 여지없이 개운해진다. 그저 그릇을 씻었을 뿐인데. 무슨 큰 의미를 두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릇을 씻고, 정리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눈앞에 놓인 감정과 문제가 씻긴 것만 같다.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릇의 표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보면 한껏 올라온 불안이 가라앉는다. 한동안 우울에 대한 글을 찾아 읽고, 고민했던 시기에 SNS에서 찾아 읽었던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어떤 시기의 나는 우울에 가라앉을 때면 일어나 세수를 하거나 샤워를 했다. 더 깊이 침잠하지 않으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을 되뇌며 머리끝까지 차오르던 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씻어냈다. 물론 눈물도 많이 쏟아냈다. 그렇게 몇 분을 흘려보내고 나면 참 신기하게도 밥이 먹고 싶거나, 커피를 마시고 싶거나, 밖에 나가 하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차올랐다. 그저 말이었는데, 그 말 한마디가 생각으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다시 설거지로 돌아가보자. 우울과 슬픔만 꾹꾹 채우던 시기를 지나 생활이 조금 안정을 찾았을 때 설거지를 하면서 알아차렸다. 스스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는 걸. 늘 좋을 수는 없지만 대체로 설거지를 하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 더미를 닦다 보면 남는 것이라고는 건조대에 헹군 그릇을 어떻게 쌓을지, 세제를 더 써서 거품을 더 낼 것인지, 오늘은 좀 대충 빠르게 마무리를 지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나뿐이다. 내가 고민하던 것들, 괴롭히던 것들은 손 끝에도 남질 않는다. 결국 남는 것은 깨끗하게 비워진 싱크대와 깨끗해진 그릇. 문제와 해결책이 한눈에 보이는 과정. 나에게 설거지는 그렇다.


설거지도 그렇다, 사는 일의 많은 것이 그렇듯. 해도 해도 끝나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을 해야 하고, 오늘 끝내도 내일 또 해야만 하는. 끝이 나지만 결코 끝이 나지 않을 일처럼. 그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결국 나를 지탱하고 있다. 매일 생활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삶의 문제도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게 됐다. 그렇게 했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면서 치우고 정리하고, 버리기도 하면서.


아무튼, 설거지를 하면 정리가 된다. 생활도 생각도. 사는 일의 많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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