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매일다른

#02. 뭐, 그런 생각을 해요.

by 운오

그런 거 있잖아요. 입는 옷에 따라 자세가 달라지고, 신는 신발 따라 걸음걸이가 달라지는. 그리고 또 있죠. 손에 쥐는 펜에 따라 글씨체가 달라지는. 연필을 쥘 때와 볼펜을 쥐었을 때, 만년필이나 마커를 잡았을 때의 제 글씨체는 변화무쌍해요. 그럴 때면 과연 ‘진짜 나의 글씨는 무엇일까’ 생각해 봐요. 정말 내가 가진 모양이 무언지, 이상하게 철학적인 질문도 해보고요. 글씨체 하나로 여기에서 저기까지 생각이 튀는 것도 제가 가진 모습이기도 하네요.


어린 시절부터 정갈하게 쓴 글씨를 보면 기분이 좋았어요. 초등학교 시절에는 연필을 손에 쥐고 글씨를 작게 쓰는 노력을 했어요. 그렇게 연필에서 샤프로 이어지는 시절을 지나 펜을 쓰기 시작한 후에 만난 펜이 있어요. 이리저리 생각도 튀고, 마음도 혼란스러운 시기에 만난 펜이었죠. ‘하이테크 - C’ 0.3. 기억도 나지 않는 이런저런 펜을 쓰다가 우연히 손에 쥔 펜. 세상에 제 글씨가 전혀 다른 모양이 되어 버리더라고요. 깔끔하고 반듯하고, 필기한 노트를 보면 뿌듯해질 정도로 말이죠. 어린 시절부터 연습하며 원했던 모양이 되어가는 듯했어요. 그래서 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필기는 열심히 했어요. 연필을 쥔 손의 가운데 손가락의 손톱 위 마디가 굳은살로 두꺼워질 정도로요. 마치 공부만 하는 사람처럼.


공부는 적게, 필기는 많이. 사실 필기는 10 정도고 나머지는 죄 낙서였죠. 사춘기 시절엔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었던 것 같아요.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모나고 패인 것들 뿐이었어요. 풀지 못하고 비워 둔 답안지를 마주하는 하루하루를 보냈죠. 그런데 가지런히 정리된 글씨를 보면 제가 남겨둔 문제들이 단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고요하고 깔끔하게 마무리된 어제 일인 양. 그래서 계속 하이테크 펜을 샀어요. 제 글씨를 깔끔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펜을. 좋은 신발을 신으면 날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말처럼. 좋은 펜으로 글씨를 쓰면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이죠. 오답을 정리하다 보면 결국 정답을 알게 되잖아요. 답을 찾고 싶었어요. 제 삶의 문제를 정리할 수 있는. 그래서 펜을 손에 쥐고 줄곧 무언가를 썼어요. 누군가에게는 낙서처럼 보일 의미 없는 문장들. 앞도 뒤도 없고, 의미를 꼭꼭 숨긴 단어들만 늘어놓은. 결코 답이 될 수 없을.


뒤죽박죽 적어 둔 노트를 펼쳤을 때, 제가 쥐었던 펜은 같은데 이상하게도 다른 모양을 하고 있더라고요. 어린이였을 때 칸과 줄을 벗어나지 않고, 일정한 크기로 글씨를 쓰려고 했던 날이 떠올랐어요. 열심히 연필심만 바라보며 썼던 글씨는 마지막에 멀리서 바라보면 늘 한 방향으로 작아지거나 커지며 기울어지기 일쑤였죠. 나이가 조금 더 들었다고 달라지지 않았어요. 펜 끝만 바라보며 썼던 글씨들은 모두 제각각의 크기와 모양을 하고 있었어요. 아주 열심히 오답으로 꽉 찬 노트만 가득 만들고 있었던 거죠. 그런 제게 작게 쓰지 말고, 크게 쓰면서 글씨를 다듬으라고 했던 어른이 있었어요. 우선 크게 쓰면서 모양을 다듬는 연습을 하라고요. 무슨 말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어찌 알겠어요. 코앞의 펜촉만 바라보는 좁은 시야를 가졌던 제가. 펜에 따라 달라지는 모양을 보면서 산재한 문제는 미뤄두고, 꾸미기만 급급한. 정작 무얼 쓰고 있고, 쓰고 싶은지는 모르고요. 그렇게 적은 것들이 답이라고 여겼어요. 왜,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라고 하잖아요. 당장 눈앞의 것만 보느라 정작 제가 적어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 채로 지냈어요. 아마도 20대의 대부분도 그런 시절을 살았던 것 같아요. 나무는커녕, 늘 심만 바라보며 쓰는 사람으로.


더 나이가 든 지금은 글씨가 단정해진다고 결코 상황이 나아지지도,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됐죠. 그리고 노트에 코를 박고 펜촉만 바라보며 쓰지 않게 되었어요. 조금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기도 하고요. 여전히 제 글씨를 단정하게 만들어주는 펜을 사는 일은 계속하지만 도구를 탓하거나 혹은 가리지 않으려고도 하고요. 정답을 찾으려 오답 노트를 만드는 일도 그만뒀어요. 그저 오답이든 정답이든 무엇으로든 채워지는 노트를 계속 쓰고 있어요. 또 처음으로 돌아가서 '진짜 나의 글씨는 무엇일까' 꾸준히 질문하고 있어요. 여전히 펜에 따라 달라지는 글씨를 가지고 있죠. 같은 펜으로도 전혀 다른 모양을 만들 수도 있고, 다른 펜으로 똑같은 모양을 만들 수도 있고요. 다시 생각을 더듬어 봐요. '하이테크 - C' 0.3을 쓰던 시절은 이런 모양을 한 저를 이해하려고 무던히 노력하던 시기는 아니었을까. 열심히 적으면서 제게 맞는 펜과 노트를 찾으려던 건 아니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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