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감 : 무 대
“영차, 여~엉차… 안 되겠어요.”
아주 아주 어두운 자줏빛, 두껍고 보드라운 커튼이 천장부터 낮은 나무 단상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 커튼 뒤에는 아이들이 선생님이 입혀 준 옷을 입고 차례를 기다린다.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커튼 뒤에서 무대 앞을 본다. 엄청 많은 어른이 보인다. 엄청 많다. 엄청, 엄청, 엄청나게.
“영차, 여~엉차. 할아버지 제가 친구를 데려올게요.”
분명 이런 대사를 해야 했을 거다. 내가 아는 ‘커다란 순무’에서 동물들이 하는 대사는 이랬다. 할아버지가 기른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무를 뽑기 위해, 온갖 동물들이 도움을 준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 함께 엉덩방아를 찧으며 끝나는. 나도 온갖 동물 중 한 마리였다. 고양이. 할아버지를 돕는 노오란 고양이.
노란색 긴 팔 셔츠, 노오란 타이츠. 그리고 노랗고 두껍고, 아주 아주 길다란 꼬리. 엄마가 내 꼬리를 아주 열심히 만드시던 기억이 난다. 살도 비치지 않는 샛노란 스타킹에 솜인지 모를 무언가를 계속 계속 넣고, 또 넣고. 넣을 수록 꼬리는 길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 꼬리를 내 엉덩이에 붙이고 커튼 밖으로 나가야 했다.
보인다. 노오란 꼬리를 엉덩이에 붙인 내가 무대 앞으로 나온다. 꼬리는 성인이 된 나의 팔뚝보다 두꺼웠던 것 같다. 기억에서는. 그 길이는 너무 길어 대여섯 살쯤 되었을 아이가 무대를 걸을 때마다 질질 끌렸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뒤에 두껍고 노오랗게 생긴 꼬리가 보였다.
앞에 서 있던 동물 친구는 누구였나. 허리춤을 잡고 열심히 당겨야 하는데, 저놈의 꼬리가 눈에 밟힌다. 아무도 저 두껍고 길고, 샛노란 꼬리를 못 보면 좋겠는데. 나에게 도움을 청한 동물 친구 허리를 잡고, 등을 바라봐야 한다. 그런데 자꾸 꼬리가 보인다. 엉덩이를 커튼 쪽으로 틀어 본다. 몸이 무대 정면을 향해 돌아간다. 아, 이제 넘어져야 하는데.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다시 털고 일어나 도와 달라고 말하러 가야 한다. 그런데 다들 왜 저렇게 웃는 거지?
‘저 애 꼬리 좀 봐봐. 엄청 길어. 왜 저렇게 두껍대?’
‘뭐라고 하는 거야? 하나도 안 들리잖아.’
‘쟤는 왜 저렇게 어정쩡하게 있어?’
엄청나게 많은 어른들이 모두 나만 보고 웃는 것 같았다. 내 꼬리를 보고 웃는다.
‘엄마, 아빠 얼굴은 보이지도 않고, 대체 내 꼬리는 왜 이렇게 길까. 어떻게 하면 이 꼬리를 가릴 수 있을까. 아무도 못 봤으면 좋겠는데.’
길고 긴 연극이 어떻게 끝났는지, 그렇게 감추고 싶던 꼬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에 없다. 그저, 무대 위에서 바라보았던 길따란 꼬리와 너무나도 커다랗던 어른들만 기억에 있다. 다시 생각해 본다. 정말 모두가 내 꼬리를 보고 웃었을까.
‘어머, 우리 애 나온다. 저기 나오는 강아지야. 엄청 귀엽지.’
‘하하하, 다음은 우리 애야. 쟤는 왜 저렇게 쑥스럼을 타는지 몰라.’
‘저 커다란 무야. 쟤가 이제 뿅 하고 튀어 오를 거야. 얼마나 연습을 했는데.’
다들 자신의 아이들을 보느라 바빴을 텐데. 아무도 내 꼬리는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우리 엄마나 내 꼬리를 보면서 좋아하셨을 거다. 본인이 아주 열심히 만들어 주셨으니까. 두껍고, 길게.
지금 다시 무대에 오른다면, 내가 갖지도 않은 꼬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딱 붙는 티셔츠와 타이츠로 오동통하게 나왔을 내 배를 감추려 노력할 거다. 아, 나는 결국 자신 있게 대사를 하고, 연기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감추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 아……………………………………………….
모든 것을 자줏빛 커튼 뒤로 가릴 수 없을 거다. 맘에 들지 않는 나의 모습도, 혹시 누가 알까 싶어 조마조마하는 실수도. 나조차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나의 상처도. 주저앉아 울던 모습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 모두. 아무리 애써서 가리려고 해도 결국에는 내가 가진 것이라 다 드러나게 될지 모르지. 내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데 나의 불행은 모두가 알 것 같다. 그런 마음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일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친구와 연락을 하다가도 마음을 감추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혹시 모를 실수를 하면 어떻게 될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며,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을 감추려 엉덩이를 씰룩거린다. 내가 갖지도 않은 꼬리를 어떻게든 감추려고.
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너무나 엄청나게 커서 내가 아무리 감춰도 내 꼬리를 다 볼 것 같다. 사실, 다들 자기 자신 말고는 달리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나만 계속 커튼 뒤에서 오르지도 않은 무대 위의 시선을 살핀다. 나를 좀 살폈으면 좋겠구먼.
“영차, 여~엉차… 안 되겠어요. 더는 꼬리 감추려고 애쓰는 거 못 하겠어요.”
개인적으로 글감을 받아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매주 메일로 글감을 받고 한 주에 한 편씩 글을 씁니다. 그렇게 쓴 글을 싣는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