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감 : 재 활 용
TV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재미있으면 끝까지 본다. 좋아하는 배우나 작가의 드라마는 챙겨 보려고 한다.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를 나열하면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가장 최근에 정주행 했던 드라마는 ‘동백꽃 필 무렵’과 ‘스토브 리그’가 있었다. 다행히 두 드라마 모두 화제가 되었기에 좋아하는 드라마 제목을 말했을 때,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없을 것 같다.
후에는 보고 싶은 드라마가 없어서 주로 넷플릭스에서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과 ‘죄인’ 시리즈 그리고 ‘빌어먹을 세상 따위’ , ‘I AM NOT OK WITH THIS’를 쭉 봤다. 3월부터 ‘기타 생활자’의 삶이 시작되었으니 시간이 차고 넘쳤다. 그리고 최근에 ‘시청 중인 콘텐츠’ 목록에 새로운 제목이 추가되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관심 있던 작가의 작품도 아닌 드라마. 시작부터 배우의 이름으로 이슈가 되었던 드라마. 관심 없었다.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어쩌다 정주행을 결심했던가.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드라마의 엔딩을 봤다. ‘푸른 수염’ 동화. 드라마에서 들려주는 동화가 내가 알던 내용과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동화 이야기 후에 나누는 형제들의 대화가 좋았다.
상태가 동생 강태에게 물었다.
“사람들과 다르면 혼자 살아야 하는 거야?”
“아니, 푸른색 수염이라도 상관없다고 인정해주는 진짜 신부가 나타나겠지.”
강태는 형 상태에게 대답했다.
사실 저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드라마에 대한 어떤 정보 값도 갖질 못했다. 그래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배우들의 패션, 얼굴. 모든 것이 화제였지만 눈에 들어온 것은 드라마 속 ‘동화’. 주인공이 만드는 동화책. 그리고 오정세 배우가 연기하는 ‘문상태’라는 캐릭터. 공교롭게 최근에 좋아한 두 드라마에 오정세 배우가 출연했다. 그리고 ‘동백꽃 필 무렵’의 ‘까불이’가 ‘문상태’의 아역을 맡았다. 그렇다. 관심을 두었던 배우가 둘이나 출연하고 있었다. 그것도 같은 캐릭터로. 충분했다. 이제 정주행을 시작한다.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들이 다 맘에 들었다. 물론 드라마이기에 마뜩잖은 우연들도 많지만, 나는 따져가며 평가하려는 사람이 아니므로 좋은 것들만 말하고 싶다. 가장 좋은 것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모습을 솔직하게 다 보여주고 있어 좋았다. 특히 ‘주리’라는 캐릭터 모습이 너무너무너무 솔직한 내 모습 같아서. 누가 보기에도 착하고, 착실한 간호사. 좋은 친구, 좋은 딸. 하지만 열 받으면 혼자 소리 지르고, 욕하고.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짜증을 내는 모습이 친숙하다 못해 허를 찔린 것 같았다. 그런 주리를 보면서 생각했다.
‘웃으면서 욕하는 게 사람이지. 이 악물고 웃는 게 사람이지.’
가진 상처가 너무 큰 이들은 그 상처로 사나워지거나, 혹은 위축된다. 상처를 감추려 자신의 몸을 바짝 키우면서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방어하거나, 모든 상처를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며 상처에 무뎌지거나. 물론 어느 쪽도 건강하게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몰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상처가 크고 깊던, 작고 얕던 쉬이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너무 보여주고 싶으면서, 끝까지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치부. 그래서 남들 앞에서 이를 악물고 웃고, 웃지만 욕할 수밖에 없는 모습. 어떻게 웃고, 어떻게 화를 내는지 모른 채로 상처를 낫게 할 방법은 모르고 살 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차라리 주리가 건강해 보였다. 웃으면서 욕하고, 또 이를 악물고 웃는 그가 덜 아파 보였다. 이불을 차면서 엄마에게 짜증을 내는 그가, 그렇게 예뻤다.
드라마 속 ‘봄날의 개’라는 동화에서 사람들 앞에서 꼬리 치고, 즐겁던 개가 밤이면 끙끙 소리를 내며 울었다. 마음은 거짓말을 못 해, 마음이 아프면 밤에 개소리를 내며 운다는 말. 그 말이 왜 그렇게 아팠을까. 나는 종종 자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턱이 아플 정도였다. 어떤 날은 종일 턱이 뻐근할 정도로 아팠다. 어떤 날은 꿈에서 많이 울어 깨어나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닦아도 마르지 않아 다시 이를 악물었다. 봄날의 개마냥, 어떻게 울음을 그쳐야 할지, 어찌하면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지 않을지 모른 채로 해가 뜨면 다시 웃었다. 우는 마음을 달래는 것 말고는 방법을 몰라서 아프게 보낸 시간이 길었다. 아픈 마음도 아물지 않는 상처도 버리지 못해 끌어안고 보냈다. 버리는 방법을 몰라서.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가벼워지고 싶었다. 눈치 보지 않고 솔직하게 울고, 짜증 내고, 욕하고 또 그러다 웃고.
드라마 정주행을 시작하고 본 첫 화에 등장하는 동화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의 마지막 내용이다. 과거의 나쁜 기억에 매일 악몽을 꾸는 소년은 마녀에게 자신의 악몽을, 나쁜 기억을 모두 가져가 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마녀는 약속을 지켰다. 어른이 된 소년을 마녀가 다시 찾아왔다. 약속한 소년의 영혼을 거두기 위해서. 그때, 소년이 물었다. 나쁜 기억은 모두 사라졌는데, 자신은 왜 행복하지 않은지. 마녀는 말했다. 온갖 나쁜 기억을 가슴 한쪽에 품고 사는 자만이 강해지고, 뜨거워지고, 유연해진다고. 그런 사람이 행복을 쟁취하는 거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정말 내가 가진 나쁜 기억을 품고 살다 보면 강해지고, 뜨거워지고, 유연해질까. 행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게 있는 아픈 상처를 가리고, 버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무리 숨을 크게 쉬고, 좋은 생각으로 머리를 채워도 지워지지 않았다. 마음은 물건처럼 다른 모양과 용도로 탈바꿈할 수 없어 어디에도 버릴 데가 없었다. 차라리 절취선이 있어서 잘라낸 마음은 분리수거가 가능하다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잘라낼 수도 없고, 누가 떼어 가서 다시 쓸 수도 없고, 내가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과 기억. 마녀의 말처럼 가슴 한쪽에 품고 살아야 하는 것.
나는 여전히 이를 악무는 날이 많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이를 악무는 나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아픈 나를 아픈 데로, 슬픈 대로, 그러다 웃는 날이 있으면 웃기도 하며 보내고 있다. 이 마음을 다시 내가 잘 쓸 수 있도록 나를 다지며. 그리고 그런 나를 홀로 두지 않으려 한다. 우리의 상처가 다르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듣는 날이 올 거라 믿으며.
개인적으로 글감을 받아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매주 메일로 글감을 받고 한 주에 한 편씩 글을 씁니다. 그렇게 쓴 글을 싣는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