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감 : 해 장
오왁. 왁!왂!왂!!!!
입을 최대한 벌려 입안에 있는 액체를 방바닥에 쏟아냈다. 눈도 입도 동그랗게. 정체 모를 액체에 한글도 떼지 않은 아이는 자신이 배운 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경험했다.
첫 음주의 기억. 나이도 기억나지 않는 나이. 기억에 있는 것이라고는 방에 둘러앉은 어른들과 보리차인 줄 알고 받아 든 컵. 어른들의 웃음소리.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던 어른인 넷째 이모부에게 된통 당한 날이다.
이모부가 준 담금주를 삼켰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그저 술이 입안에 들어갔을 때의 독한 향과 맛에 그냥 다 뱉어버렸다. 내 기억 속 최초의 음주. 물론 해장 따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험이 비슷하려나. 수능 지나고 친구들과 함께 마신 맥주가 공식적인 첫 음주로 기록됐다. 많이 마시지 않았지만 취했고, 그날 밤에는 옥수수가 목에 걸려 눈앞이 하얘지는 겨울밤을 가졌다. 결국 옥수수 알은 내 숨을 앗아가지는 않았지만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것 같다. 정말 눈앞이 하얘졌다. 온 세상이 하이얀 채로 실로 아득한 몇 초를 보냈다. 아니 몇십 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해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면서 시작된 음주의 삶은 가히 기록적이다. 매주 마셨고, 다양하게 마셨고, 많이 마셨고, 멈추지 않았고, 결국 취했다. 기억나는 밤도 있고, 여전히 미궁 속인 낮과 밤이 있다. 취해야만 할 것 같은 나이답게 많은 것에 취하고, 다음 날이면 또 멀쩡하게 새 사람, 새 부대가 되었다. 해장 따위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두부전골 집이었다. 나는 아직 이십 대를 살고 있었고.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취하고 싶었는지 친구가 만들어 주는 술을 잘도 마셨다. 연달아 일곱, 여덟 잔을 마신 후였나. 두부전골 집이 카페 마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두어 시간도 되지 않아 많은 기억을 잃었다. 그리고 내가 담고 있던 많고 많은 것들을 함께 비워버렸다. 모조리 비웠다. 속이 텅텅 비고, 머리도 텅텅 비었다. 그리고 지독한 숙취가 시작되었다.
“술 마시며 한 말과 행동은 모두 없는 일이에요.”
술친구와의 약속. 어떤 실수도 용서가 되는 날을 가질 수 있는 약속.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숙취가 있는 날이 늘수록,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는 날을 늘렸다. 전에는 걱정하지 않고, 다양하게, 많이, 멈추지 않으며 마시던 술을 조마조마하며 마셨다. 그렇게 마시다가도 많이 지치는 날에는 숙취 따위 없는 것처럼 마셨다. 하지만 없을 리 없다. 깨질 듯한 머리와 위아래가 뒤집어지는 뱃속. 도무지 돌아올 리 없는 기억. 아니, 지워지지 않을 기억.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시고, 취해도 해장은 하지 않는 삶. 나는 그런 몸이 아니었다. 마시고, 취하고, 토하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반복하고. 이제는 무서워 마시는 것조차 시도하기 겁나는 몸이 됐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곳곳에 염증과 상처, 그리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았다. 술을 마시기 전에 미리 음료를 마시거나, 술을 천천히 마시거나, 혹은 적게 마시거나. 마시고 난 후에 속을 달래 줄 방법을 쓴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좋은 건가 싶어 무작정 달려들었는데, 시작하고 나니 무를 수도 지울 수도 없었다. 취하면 기분 좋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눈에 뵈는 것 없어 마냥 좋았다. 깨어나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여기저기 상처가 보이고, 창피하고, 되돌리고 싶은 것들 투성이었다.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것만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할 뿐. 그리고 속에 남은 상처들이 결코 쉽게 아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서른이 넘었다. 아무리 취하고 싶어도 술을 전처럼 마시지는 않는다. 지금은 취해도 기분이 좋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아 절로 조심하게 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흥건하게 취해보고 싶어도, 후에 찾아올 통증이 끔찍해 발끝을 담그기도 두려워졌다. 차라리 이모부가 건네주신 것이 보리차인 줄 알고 마셨던 나는 이렇게 겁을 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니, 다 삼키기 전에 미리 뱉었구나...나는.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았을지 모른다. 이거 위험한 거라고.
이렇게 괴로운 과정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시작하지 않았을까. 시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괴롭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여기저기 남은 흉터를 다 도려내고 곱게 바느질해서 새 부대가 될 수는 없을까. 아무것도 없던 때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글을 다 떼고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아도 말할 수 없는 것, 알아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어쩌면 알아 버려 차마 다시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쌓였다. 아무리 마시고, 취하고, 토하고, 후회하고, 반성해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겁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너무 마시고 싶은데, 기분 좋게 취하고 싶은데. 후폭풍 따위 걱정 않고 마실 수 있는 날이 다시 오려나. 겁내지 않고, 시원하게 맥주캔을 따고. 벌컥벌컥 마시고. 일어나서 좋아하는 북엇국으로 해장하고. 물론 별별 방법으로 해장을 해도 내 부대는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나하게 취해 무엇도 용서받을 수 있는 낮과 밤을 보내고 싶다. 밤과 낮이어도 되고. 뭔들 상관있을까.
개인적으로 글감을 받아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매주 메일로 글감을 받고 한 주에 한 편씩 글을 씁니다. 그렇게 쓴 글을 싣는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