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감 : 제 철
이번 주에도 야구를 봤다. 상대 팀 투수는 유망주로 불리며 현재 팀에 입단했던 선수라고 해설자와 캐스터가 설명한다. 그리고 그동안 부상과 성적 부진으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유망주. 많은 가능성을 가진 이들은 그렇게 불린다. 유망주. 자신이 가진 가능성뿐 아니라 남들이 기대하는 가능성도 지고 가는 사람은 아닐까. 마운드에 서서 전력을 다해 공을 던지는 투수를 보며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시즌에서의 첫 등판. 오랜 유망주는 어떤 짐들을 저 어깨에 지고 올라왔을까.
슬럼프를 겪는다.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저조한 상태가 지속될 때를 슬럼프라고 한다. 그런데 슬럼프도 좋은 성적을 냈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단어는 아닐까. 실력이 좋아 높은 성적을 유지했던 이들에게 허용되는 관대함. 눈에 띄지 않지만, 꾸준히 해왔던 사람들에게도 슬럼프라는 배려 넘치는 말이 허용될까.
한 해는 여름이 왔는데 수박을 거의 먹지 않았다. 더운 계절엔 늘 수박을 먹었는데, 그 해는 먹는 수박마다 맛이 없었다. 제철 과일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그 해는 어떤 과일도 맛이 없었다. 봄에 먹었던 딸기, 포도, 복숭아도 뽑는 것마다 ‘꽝, 다음 기회에’를 뽑아 든 지지리 운 없는 계절의 연속이었다. 맞이하는 계절마다 슬럼프였다. 유망주들은 여지없이 실력 발휘를 못 하고 강등당했다. 다음 시즌을 기약하며 빠르게 빠르게. 과연 다음 계절에는 제 실력을 펼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계절이 돌아오면 여지없이 찾게 될 것이다.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은 팀을 응원하며 야구를 보는 올해처럼.
슬럼프의 해를 지나고 올해는 수박을 많이 먹었다. 먹었던 수박마다 맛있었다. 고르는 과일마다 맛이 좋았다. 올해의 나는 철 지난 과일처럼 살고 있는데, 내가 먹는 과일들은 그들의 전성기를 살고 있었다.
제철. 사람의 제철은 언제일까. 소위 말하는 전성기가 그때일까. 나의 철은 언제일까. 언제였을까.
‘인생의 황금기는 늘 지금이 아닌 곳에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에 있는 문장이다. 기억하고 있는 문장 중 하나. 처음 저 문장을 읽었을 때는 ‘그래, 맞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저 문장을 기억할 때면 ‘내가 이렇게나 멍청하구나’하고 생각한다. 황금기를 지나왔다고 여기거나, 혹은 아직 오지 않았다며 유망주로 살기를 택하거나, 계속해서 과거와 미래를 곁눈질하며 지낸다. ‘꽝! 다음 기회에’ 뽑기 종이를 손에 쥔 채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산다.
유망주라 불리며 마운드에 선 투수는 나쁘지 않은 경기를 보여주고, 교체됐다. 더그아웃에 앉아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의 전성기가 시작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오늘 경기를 후회하고 있을까. 혹은 만족하고 있을까.
유망주. 슬럼프. 남들이 붙이는 말들. 선수는 연습하고, 시합을 치르고. 시즌을 마치면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시간을 반복할 것이다. 내가 일어나고, 하루를 치르고 다시 내일을 맞으려 잠을 자는 일을 반복하는 것처럼. 주변에서 자신에게 붙이는 말을 이고, 지고 오늘을 그리고 경기를 치를 것이다. 돌아보면 힘들거나, 아픈 시기에도 매일을 사는 일은 거르지 않았다. 꾸준히 치르는 일들이 버거워져도 다시 내일을 맞았다. 돌아본 어제는 흐릿해졌고, 기다리는 내일은 알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슬럼프 같던 날들, 사람들은 종종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내게 말했다. 그 말이 그렇게 슬펐다. 시간이 지나 괜찮아지는 것은 없었다.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흉터가 진 자리는 언제고 다시 욱신거렸다. 내가 느끼는 통증에 남들의 말과 시선이 더해졌다. 속은 곪았는데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다. 야구처럼 내 자리를 대신해 줄 교체 선수가 없어서 1회부터 9회까지 매일 전력을 다하다가도 손에 쥔 ‘꽝! 다음 기회에’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다음 기회가 찾아올까. 유망주는 전성기를 맞을 수 있을까. 더그아웃에서 나와 마운드에 서서 공을 던질 기회가 또 올까. 철을 만나 선전할 수 있을까. 정말 황금기는 오늘이 아닌 어제와 내일에 있는 걸까.
“지금을 살아야 하잖아요.”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뿌리를 잘 내리도록 다져줘야 한다고 했다. 계속 어제를 돌아보고, 내가 하지 못한 일과 상처를 들춰내는 나에게 지금을 살아야 한다고만 하고, 내일로 가라고도 하지 않았다. 당장 괜찮아질 수 없다고.
인생의 황금기를 돌아보거나, 기다리지 않으려고 한다. 뒤돌아본다고 돌아갈 수 없고, 기다린다 한들 바라는 모습으로 오지도 않을 테니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도 믿지 않는다. 시간이 하는 일은 없다. 그 시간을 사는 것은 결국 나인데, 모든 공을 시간에 돌리면 안 될 것 같다. 내 상처를 돌보는 것도 벅찬데, 남들이 지워 놓은 짐을 이고 지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다.
선수는 오늘 경기에 출전하지 못해도 어제도 내일도 공을 던지고, 치고, 달릴 거다. 유망주라고 불리는 선수도, 전성기를 보내는 선수도, 아직 어떤 말도 짊어지지 않은 선수도. 더그아웃이 아니라 경기장에 서는 날을 위해서. 후회도 만족도 오늘 일이고, 내일은 또 다른 하루를 보내면 된다. 매일이 내 ‘철’이면 된다. 뽑기 종이를 새로 만들자. 내가 만들고 내가 뽑으면 되지.
‘네! 오늘이 제 ‘철’입니다.’
매일 같은 뽑기를 뽑아 들 겁니다.
개인적으로 글감을 받아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매주 메일로 글감을 받고 한 주에 한 편씩 글을 씁니다. 그렇게 쓴 글을 싣는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