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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섭 Jan 05. 2024

시 : < 능금이 떨어지던 날 >

< 능금이 떨어지던 날 >



살맛나는 세상을 지저귀는 멧새들이

활기찬 하루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제법 근사한 능금들을 보세요.

아침마다 색다른 옷을 갈아 입으며

가지마다 평화스런 나뭇잎을 흔들고 있습니다.

어느새 뿌리신 씨앗이 자라

소망하시던 열매가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꽃보다 향기로운 천사의 풋내음이

집안 구석구석에 퍼질 때가 되면

알알이 땀방울로 영근 과실을 따서

수십 년 갈고 닦은 정성의 소반에

풋풋한 마음으로 담아 드리려고 합니다.

다가올 그런 날들을 기꺼이 반기시면서

오랫동안 침묵하신 묵직한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림 같은 우리의 이야기가 들리시는지요.

벅차오르는 결실을 앞에 두고

고단한 꿈을 꾸고 계신지 석달이 넘었습니다.

이제 그만 벌떡 일어나시어 눈을 뜨시고

굳게 다문 입을 여시어 무슨 말씀 좀 해 보세요.

꿈을 싣고 창공을 나는 새들을 향하여

함께 날자고 힘껏 외쳐도 보세요.

우리의 능금은 붉은 사과가 되기 위하여

이렇게 시시각각 익어가고 있는 지금,


어찌하여,

어찌하여 적막한 방안에는

힘겹게 뛰어 가던 초침마저 멈춰버리고

품 속은 한 순간의 쉼임도 없이

허망하게 식어만 가고 있단 말씀입니까.


오직 붉은 빛깔만을 향하며 달려온

궂었던 우리의 수 많은 날들

힘들게 견디며 굵어진 이 거친 마디들에서

빛을 잃고 떨어지는 우리의 능금은

이제

무엇에 써야한단 말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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