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제10조.나는 지체장애인, 뜨겁게 사랑하련다!_11

헌법 제10조

by 이종섭

제3부. 천형(天刑)



11. 흔들리는 여심


아영은 여지 것 아무리 진호가 그립고 보고 싶었어도 진호에게 전화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전화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제는 전화를 해도 될 것만 같았다.

이렇듯 32년 만의 아영의 일탈(逸脫)은 자신의 생활 분위기와 사고방식을 180도로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남들이 알던 모르던 간에 이제 자신은 속된 말로 숫처녀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인생 중에서 너무나 지독한 쓴 맛을 보면서 살아왔지만, 이제 단맛도 본 사람이었다. 여자의 인생에 있어서 이 보다 더 단맛이 어디 있으랴. 아영은 그날을 ‘제2 생일날’로 명명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복지원 원생들은 간혹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오빠의 그날 행동과 표정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제2 생일날’ 이후 3일 째 되는 날 아영은 용기를 내어 처음 전화를 걸었다.


“어보세요.”

“옵~빠, 저예요, 아영이.”

“어,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며칠 있다 들릴 깨. 좀 바쁜 일이 있어.”

“네, 그럼 끊을 게. 또 봐요, 오빠.”

“그래.”


분위가가 바뀐 자신과는 달리 오빠는 변함없이 무뚝뚝하기만 하였다.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쑥스럽고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날짜가 며칠 지났음에도 ‘제2 생일날’ 밤의 기억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다음날 아영은 일기에 자신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적어 놓았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아영은 이를 꺼내어 읽고 또 읽었다.


“찰나도 예견 못할 두려운 새벽

고요한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먼 하늘, 찬란히 비치는 감동적 광채

순결한 마음을 바라보듯

밝아오는 천지는 태초를 말한다.

지나던 바람마저 숨이 멎으며

가슴은 맥박 치듯 힘차게 벅차오르고


아!

눈물겨운 감격, 견딜 수 없는 기쁨

인간만이 느끼는 아름다운 착각이었다.”


아영은 이 시의 제목을 <환희(歡喜)>라고 붙였다. 진호 오빠를 만나면 선물로 주려고 마음먹었다. 아영은 오빠가 이 시를 읽었을 때 어떤 표정일까? 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오빠는 오지 않았다. 날이 더워지자 난방용으로 가스를 거의 쓰지 않는 관계로 가스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주문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뚝뚝한 오빠에게 다시 전화를 한다는 것도 망설여졌다.

아영의 표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또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고 보니 참을성이 옛날보다 많이 약해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발생할 때에는 짜증도 부렸다. 점차적으로 오빠한테 서운한 감정마저 들기 시작하였다.

결국 진호 오빠는 ‘제2 생일날’ 이후 보름 만에 가스를 배달하기 위하여 들렸으나 아영에게 대하는 태도는 ‘제2 생일날’ 이전이나 별반 다름없었다. 뭐가 그리 바쁜 지 그저 커피 한 잔 마시고는 안부 한 번 묻는 정도였다. 아영은 진호 오빠에게 주려던 자작시 종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건네주지는 않았다. 오빠의 무뚝뚝한 태도로 인하여 다정한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은 그런 기분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2 생일날’ 이후 처음으로 오빠가 다녀간 날 밤, 아영은 시를 박박 찢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썼다. 제목은 조금 자극적으로 <짓밟힌 약속>이라 했다. 그런 다음 이 시를 프린트하여 편지봉투에 넣었다. 오빠가 다시 들른다면 일 보고 돌아갈 때 그 봉투를 슬그머니 전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찬란했던 무지개

오색을 뛰어넘는 헤아릴 수 없는 조화

겹마다 빛나는 신비로운 채색들...


마음 설레며 바라보던 미래는

층층이 뻗어 간 상상을 떠다니면서

나는 진정 기다리고 기다렸었소


하지만, 날은 저물어 하늘에 숨어 버린 채

사라져버린 허망한 우리들의 신기루

노을 속 무지개는 흔적이 없고

붉은 하늘만 참 아름다웠소”


그러면서 하늘을 바라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신문과 소설, TV드라마 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다른 형제(이곳에서는 같은 원생들을 ‘형제’라 불렀다.)에게 주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요즘 시대의 젊은 사람들은 성관계를 정신적 사랑에 대한 약속의 증표로 생각하기보다는, 무료한 삶속에서 육체를 즐기고자 하는 오락의 한 가지 정도로 간주한다고 하였다. 때문에 요즘의 남자들과 여자들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고 했다. 바로 진호 오빠도 사랑의 마음은 없고 육체적 즐거움만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제2 생일날’ 사건을 무의식적으로 사랑에 대한 약속의 증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빠는 또다시 열흘이 지나고도 나타나기는커녕 소식조차 없었다. 참다못해 처음으로 핸드폰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요즘도 바쁜가보네요.”


그러나 저녁때까지 기다려도 답변은 없었다. 이제는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날 밤 늦어서야 가스배달을 왔지만 역시 무뚝뚝하게 커피 한 잔 마시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가고 말았다.

밤이 깊어지면서 이제는 슬퍼졌다. 생각할수록 절망적이기까지 하였다. 날이 갈수록 두 어깨의 기운이 빠져갔다. 이제 왼쪽의 손목은 힘을 주기도 어려워졌다. 몸이 옛날보다 더욱 빨리 굳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컴퓨터에서 타자를 칠 때에도 왼손은 Ctrl key와 Shift key를 누르는 정도였다. 그것도 책상 위에 어깨받침대를 놓아야 만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오른손이라도 원활하게 쓰는 것도 아니었다. 이젠 두 문자를 동시에 누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완전한 독수리타법만이 가능한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두 달이 넘었다. 장마철이 되어 날마다 비가 내렸다. 전에 써 놓았던 <짓밟힌 약속>이란 자작시를 꺼내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 혼자만의 신기루였어. 비 내리는 지금의 하늘은 결코 아름답지가 않아.’


자판(字板)에도 빗방울처럼 한 두 방울 씩 눈물이 떨어졌다. 아영은 느릿느릿한 솜씨로 한 자씩 한 자씩 타자를 쳐 나아갔다. 먼저, 제목을 <후회>라고 쳤다. 타자는 계속 이어졌다.


“그 날 밤,

달빛은 구름에 싸인 채

온 세상이 꽃밭으로 변해가고 있었지요.

황홀한 축복을 느끼면서...


어두운 하늘,

흐르는 강물이 암시하는 의미도 모른 채

착각하며 환상의 세계로 달려만 가고 있었답니다.


타부(taboo)!


저주받은 운명은,

들뜬 마음으로 거리를 방황하면서

헤어날 수 없는 늪으로 깊이깊이 빠져 들고 있었답니다.”


아영은 철쭉꽃을 가슴에 안고 경부고속도로와 올림픽 대로를 달리던 생각을 하고 또 하였다. 다시 오빠가 웃옷을 벗어 자신의 어깨를 덮어주던 일을 기억하며 당시는 참으로 여성을 배려하는 다정한 오빠였다. 라고 생각을 해 보았다. 강가에 앉아 시를 읊으며 대화를 주고받고는, 시내를 돌다 노래방에 들러 ‘내 몫까지 살아 주’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던 오빠. 그러나 지금 오빠는 변해있었다. 아니 엄밀히 이야기해서 원점으로 돌아왔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몰랐다. 정말 오빠를 믿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아영은 계속 타자를 쳤다.


“반짝이는 눈빛이

서로의 시선에 부딪힐 때마다

목 타는 갈증, 줄기차게 단비를 뿌리고

힘찬 날개 퍼덕이며 높이 하늘을 날면서

천국은 환생으로, 환생은 또다시 천국으로...”


아영은 더 이상 쓰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책상에 얼굴을 떨어뜨렸다. “천국은 환생으로, 환생은 또다시 천국으로...”, “천국은 환생으로, 환생은 또다시 천국으로...”, “천국은 환생으로, 환생은 또다시 천국으로...”.

인기척이 있어 살며시 고개를 들고 뒤를 보니 장애인활동보조도우미 정 언니가 뒤에 서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 주무셨어요?”

“나도 잠이 안와서..., 충격이 크겠지만, 너무 슬퍼하지 마. 건강을 생각해야지.”


정 언니는 아영의 어께를 부드럽게 두드려주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누구의 어떠한 말도 지금 자신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는 다고 생각하였다. 멈추었던 타자는 또다시 또박또박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어둠이 끝나,

천지가 걷히면서 멀었던 눈이 뜨이니

사나운 바람마다 절규하는 가슴 속을 사정없이 파고드는데

그 때마다 사무치게 밀려드는 노을져간 향수

한참을 헤매는 번뇌의 시간, 시간들...”


밖에서는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바람까지 휘몰아쳤다. 물을 끼얹듯 유리창에 빗방울이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곧 이어 세상을 부숴버리기라도 하듯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가며 대지를 흔들고 천지를 환하게 밝히곤 하였다. 타자는 멈추지 않았다.


“분노한 하늘마저 소낙비를 퍼붓고

야위어 가는 병든 몸은 외로움에 찔리며 몸서리칠 때

못난 내 마음은 날이 가면 갈수록

싸늘히 식어 가는 공허한 가슴을 채우지 못한 채

메아리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다 소리치며 울부짖었습니다.


때늦은 후회

나는 결코 용서 받지 못하리라.

씻겨지지 않는 더러운 손으로 하늘에 빌며

지울 수 없는 흔적, 통한을 회상합니다.


하지만 뉘우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그토록 선명한 지난날들의 발자국은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잔인하게 긴 어둠의 날들...”



타자를 마친 아영은 밀려드는 서러움에 어깨를 들먹이며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모두가 잠든 밤, 통곡하는 소리는 고요하기만 하던 실내의 어둠 속으로 구성지게 울려 퍼졌다. 소리가 문틈을 통하여 밖으로 새어나가자, 뜰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던 화초들마저 슬프도록 흐느끼는 것만 같았다.



12.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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