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꿈_13

베투남인들의 한국 이민 개척사

by 이종섭

제3부. 젖은 땅에 뿌리가 자란다.



23. 죽음보다도 두려운 운명의 길


Anh(Nguyen Thi Bao Anh)은 아빠와의 통화를 끝내고 또다시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삼촌이 오토바이 사고를 냈다며 백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으로 시집가서 그런대로 부족하지 않게 살고 있다는 딸에게 어려울 때마다 기댈 수밖에 없는 아빠의 처지를 Anh이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국으로 시집오는 여성들은 그 원인이나 동기가 대부분 경제적인 문제에 있었으며, Anh의 경우도 또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약 2년 전, 국제결혼과 함께 한국 입국 후 처음 반 년 간은 신혼이었던 관계로 시댁에서 가난한 베트남 친정집을 이해하여 한 달 50만원씩 송금해주기로 한 것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친정 부모님들께서도 이제 빚을 얻지 않게 되었다며 전화할 때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송금문제라는 것은 직업도 없이 부모님들과 함께 살고 있는 한 남자의 어린 아내 Anh에게는 새로운 고통의 씨앗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남편은 정도가 심하지는 않았어도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정신지체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시댁 부모님들께서는 웬만하다면 자식의 부부관계를 고려하여 며느리의 청을 들어주려 노력하였다. 한국입국 후 곧 언니가 시집을 가게 되었을 때 사돈댁의 첫 경사라며 선뜻 2백만 원을 축의금으로 보내드린 것도 장애인인 아들에게 딸을 보내주신 고마움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Anh의 친정 부모님들에게 있어 습관성만을 유발시키는 일종의 마약과 같은 효과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로부터 친정 부모님들은 돈 냄새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처럼 한두 달이 멀다하고 사건이 터졌다며 연락을 해 왔다. 집 지붕이 부서져 비가 샌다며 수리비가 필요하다하였고, 동생이 대학을 들어가게 되어 등록금이 필요하다고 하였으며, 낡은 오토바이를 교체해야 하므로 돈이 필요했으며, 할머니의 칠순 생신인데 불효를 할 수 없어 잔치비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더니 이제는 이웃에 사시는 삼촌, 사촌의 일까지 보살펴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50만 원이면 두 달의 생활비에 해당하였음에도 이제는 돈쓸 일이 많아지다 보니 그 액수로는 한 달 생활비로도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친정 부모님들께서는 일자리가 생겨도 건강을 이유로 노동을 거부하신다고 하니, 어린 나이의 Anh은 그저 한숨만 나올 따름이었다. 아빠는 이미 술을 거르는 날이 없을 정도로 폐인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제는 시부모님들께서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전화요금이 나오면 통화내역을 따지며, 용돈을 써도 반드시 영수증을 확인하고 만다. 목돈의 송금문제가 나오면 한동안은 집안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급격히 늘어나곤 하였다.

신뢰상실에서 오는 문제는 금전적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시어머니께서 어쩌다 외출하고 돌아오신 경우, 그 시간동안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보고해야 하며, 전화통화를 하는 경우에도 누구와 무슨 일로 통화를 했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었다. 임신은 왜 안하는 것이냐고 물을 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단지 시부모님께서는 하루 빨리 아기를 낳아줄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크게 야단을 치지 않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이제는 웬만해서는 친정의 금전요구가 있다 해도 그대로 말씀드리기가 어려웠다. 이불속에서 남편에게 이야기하면 결국에 가서 시부모님들께서 들어주지 않을 수 없겠지만 더 이상 손 벌릴 염치가 없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지난번 할머니 칠순 때에도 고민 고민 하다가 결국 친구 Mai에게 50만 원을 빌려 아무도 몰래 보내드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Anh은 한국으로 시집온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되었다. 처음 한국에 입국하고 열흘 만에 남편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너무나 놀라 당장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당장 갈 곳도 없었을 뿐 아니라, 50만원씩 매달 송금해주는 문제로 인해 친정집이 마음에 걸려 달아날 수가 없었다. 더더군다나 친정집에 어려운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그 돈이 부담이 되어 아예 도망갈 꿈 자체도 꾸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한계에 와 있다는 것을 Anh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시부모 또한 이러한 복잡한 문제의 한쪽 당사자이기 때문에 며느리가 행여 갑자기 도망가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한국 입국한지 만 2년이 넘었음에도 국적신청을 해 주지 않고 있었다. Anh은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더욱 빨리 이 집을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Anh은 고민을 거듭하였다. 한 번 나가면 불법체류자의 신세가 될 뿐 다시는 돌아올 수도 없거니와 친정집에도 돈을 보낼 수 없어 전화 또한 당분간 할 수 없다. 그 때는 버린 자식이 되고 말 것이다. 또 나가면 돈을 벌어야 하므로 직장도 필요하며, 당장 먹고 자야할 곳도 필요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Mai가 Van이라는 남자를 소개하면서 그에게 직장을 부탁해 놓았다며 전화번호까지 가르쳐 주었으니 최소한 한 가지는 해결된 셈이었다. 방도 원한다면 같은 방을 둘이서 함께 써도 좋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합숙 방식은 한국에서 불법체류자들이 드물지 않게 사용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살아봐도 생소하기만한 이국땅에서, 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고 이해해줄 사람도 없으며,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려 생존의 기로에 서있는 사람들이 구태여 타국의 도덕률에 억매여 힘들게 사는 것 보다는, 같은 처지의 같은 국민끼리 모여 숙식을 함께 함으로써 서로 이국의 설움을 달래고 정보도 교환하면서 사는 것이 제2의 삶을 준비하는데 있어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결혼을 전제로 하는 것도 아니며 떠나가는 상대를 붙잡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일순간 효과적으로 머무는 생존방식에 더도 덜도 아닌 것이었다.

어떻든 이미 탈출을 결심한 이상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Anh은 아직 삼촌의 오토바이사고 건을 남편이나 시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으므로 현재의 감시는 그리 심한 상태는 아니었다. 시아버지는 평일 아침마다 출근하니까 낮에 시어머님이 외출할 때를 기다렸다가 남편을 따돌리고 탈출해야만 했다.

버스정류장과 버스노선도 알아놓았다. 이곳 잠실에서 Van이 있다는 병점까지 가려면 지하철이 편리하다고 했지만, 지하철을 한 번도 타보지 못했으므로 하는 수 없이 택시와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 번호도 바뀌어야 하므로 충전용으로 하나 더 마련해 두었다.


기회는 눈이 내리는 금요일에 찾아왔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니 시어머니께서 동창회에 간다며 나가시었다. 남편은 매일 그러하듯 잠깐 낮잠을 잔다며 침실로 들어갔다. Anh은 지금까지 사용하던 핸드폰을 TV 앞에 내려놓고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간단한 옷가지와 여권을 포함한 신분증, 그리고 꼭 필요한 소품 등을 크지 않은 가방에 넣어 문 앞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꼬깃꼬깃한 비상금 17만 원이 남아 있었다.

이제 출발하기 위하여 TV를 비교적 크게 틀어 놓은 다음 세탁기도 함께 틀어놓았다. TV와 세탁기가 어울려 제법 큰 소음을 발생시키자, 그 틈을 이용하여 가방을 들고는 현관문을 살며시 열었다.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후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비상구 방화철문을 열고 들어가 비상계단을 통해 한 층을 내려갔다. 다시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와 엘리베이터 하향버튼을 눌렀다. 혹시 아는 사람과 마주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비상구 계단 쪽의 방화철문 뒤에 숨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보니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몇 사람이 타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방화비상문을 은폐로 하여 숨소리까지 정지시키며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 불과 몇 초에 불과한 시간이 기절할 만큼 길게 느껴졌다. 가슴은 계단이 울릴 정도로 더욱 크게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자 다시 들어와 하향버튼을 누르고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였다. 한참 후 드디어 열린 엘리베이터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 다음 그것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이어 아파트단지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산을 펴서 앞을 가리고는 사람 사이사이를 달려 나아갔다. 버스정류장으로 가서는 행선지를 확인 할 필요도 없이 제일 먼저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고서 무작정 한 정거장을 간 다음, 다시 내려 그곳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서, 성남터미널까지 얼마?”

“거기 3만원은 나올걸요?”

“거기 가주세요. 병점 버스 타는 곳.”

“네~”


돈을 아끼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버스를 타야 하겠지만 길을 모르니 갈아타기가 번거로워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뛰던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 되는 듯 하였다. 탈출에 성공했다는 안도감이 들어서였다. 성남에 도착하여 다시 Van이 가르쳐주는 대로 버스를 갈아타고 병점으로 향했다. 버스에 앉아 Mai에게 드디어 결단을 내려 집을 나오게 되었다는 내용의 전화를 한 다음, 남편에게도 ‘발신번호 불명’ 옵션으로 짤막한 이별의 메시지를 띄웠다.


“미안해요, 여보. 많이 사랑해요. - Anh”


남편에게는 정말 미안하였다. 불쌍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글썽이는 눈망울로 차창 밖을 내다보니 함박눈이 앞이 안보일 정도로 펑펑 내려 쌓이고 있었다. 눈은 갖가지 더러운 욕심으로 물들어진 온 천지를 하얗게 지워버리고 있었다. 길 가에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반짝거렸고, 버스 안에서는 세상에 축복을 알리는 크리스마스캐럴이 신나게 울려나왔다.

그러나 이 함박눈은 결코 자신에게 축복의 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Anh은 알고 있었다. 돈 소식에 목이 타도록 기다리실 친정 부모님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미어터졌고, 조금 모자라긴 했어도 착하기가 비길 데 없는 남편 또한 정이 들어 죄송스럽기 짝이 없었다. Anh은 시부모가 남편의 곁에서 떠나갈 경우 자신이 먹여 살릴 수밖에 없는 남편과 영원히 함께 살 생각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는지 Anh은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Anh은 지금 자신 이외의 다른 누구의 처지도 생각할 입장이 아니었다. 베트남에서 친지들의 축하를 받으며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리고는 다시 벅찬 마음으로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의 그 부풀었던 꿈들, 이 모든 것도 이미 허공 속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지금은 오직 이 낯선 나라의 추운 거리에서, 단 한 치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죽음보다도 두려운 운명의 고행 길로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숨이 막힐 정도로 걱정될 뿐이었다.



24. 동사(凍死)의 기로에 서서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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