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꿈_14

베트남인들의 한국 이민 개척사

by 이종섭

제3부. 젖은 땅에 뿌리가 자란다.



24. 동사(凍死)의 기로에 서서


날은 어두워지고 가로등과 상점의 불빛들이 거리를 밝혀주었다. 전철 역사를 뒤로하여 그 앞으로 조그마한 광장이 있는 듯 없는 듯 하고는 곧바로 차도가 나왔다. 그 차도에 있는 택시 승하차장과 전철역 공영주차장 사이에 택시승차대와 포장마차가 무질서하게 위치해 있었고, 그 택시 승차대 앞이 바로 Anh과 Van이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였다.

공영주차장 앞으로는 건널목이 설치되어 있고 그것을 건너면 바로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어 삼거리를 이루고 있었다. 도로는 주간선도로나 골목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왕복 2차선의 좁은 길이어서 차들이 빽빽하게 밀리게 되므로 길 건너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골목길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좋은하루’라는 간판의 24시편의점이 위치하고 있고, 그 가게를 끼고 골목에 들어가서는 노래방과 음식점들이 모여 있어 골목을 제법 번화하게 만들고 있었다.

‘기린 마트’라는 가게의 유리문에는 China, Indonesia, Plilppiness, Vitemam, Thailend, Mongolia 라는 아시아 각국의 나라명칭들이 영문 알파벳으로 새겨져 있어 이곳이 다국적 타운을 이루는 곳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전철 역사에서 몰려나오는 사람들과 버스와 택시를 타는 사람들이 함께 뒤엉켜 정신없이 붐비는 이 거리. 주위의 건물들은 높지도 않으면서 대부분 낡아있었고 조명도 그리 화려하지도, 밝지도 않아 조금은 음산한 기분까지 느끼게 하였다.

중년 여인이 빨간색 고급세단을 몰고 신호를 받아 삼거리를 통과하였다. 혹시 시어머니의 차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보행신호기 앞에는 얼굴도 검고 점퍼와 바지, 운동화까지도 검은 한 남성이 누군가와 큰 소리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다른 나라의 취업 근로자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 사람은 한국 생활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Van은 하얀 오리털 파카를 입고 나온다고 했지만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벌써 약속시간은 5분이나 지나갔다. 웬 지 걱정이 되었다.

건널목의 신호가 바뀌자 사람들이 휩쓸려가듯 길을 건너가고 건너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Van으로 생각되는 사람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자선냄비 앞에서 흔드는 구세군의 종소리가 몹시 시끄러웠다. 쌓이는 눈은 어느새 발목을 덮고도 남았다. 간간히 이는 찬바람에 눈발이 날리어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손도발도 시리고 몸 전체가 떨렸다.

견디다 못한 Anh은 핸드폰을 꺼내 다이얼버튼을 눌렀다.


“Alo(여보세요)”

“Alo, 어디?”

“조금만 더 기다려. 거의 다 끝나가.”


간혹 시어머니께서 입버릇처럼 ‘베트남 사람들은 약속을 너무 안 지켜!’ 라고 말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Anh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게 하는 이야기였지만 당시에는 베트남인의 한사람으로서 결코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해주면 될 텐데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Van이 야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Anh은 그런 불평을 할 입장도 처지도 아니었다. Van은 갈 곳도 없는 자신의 생명줄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나온 지 불과 몇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남편이 있는 잠실아파트의 훈훈한 온기가 간절히 그리워졌다.

남편은 지금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어머니께서는 보내준 돈이 얼마냐고 분통을 터트리고 있을 것이다. 친정집에서는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언제 돈이 오나 눈알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빠에게 기대려고 하는 삼촌, 사촌 등 친척들이 너무 미웠다.

Anh은 별의별 생각을 하다가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Mai? 나 Anh, 지금 통화해도 돼?”

“Anh! 그래. 너의 시어머니한테서 전화 왔었어. 경찰에 신고했데, 안 들어오면 불법체류자 된다나?”

“나 잘못한 거 없어, 그런 건 이미 각오했거든. 잡히면 난 자살 할 꺼야. 그리고 이혼해도 난 국적 신청할 수 있어. 2년 넘었거든.”

“내가 생각해도 한국사람 엉터리야. 하지만 자살은 안 돼! 붙잡혀서도 안 되고.... 조심해야 해.”

“그래, Mai, 부탁 좀 하자. 우리 엄마한테 전화 좀 해줘. 흐윽~, 나 집 나와서 앞으로 돈 못 보낸다고... 흑흑...”

“그래, 걱정하지 마. Van 만나면 다시 알려줘.”

“나 정말 한국서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쩐지 자신이 없어.”

“용기를 가져. 한국이란 나라가 만만하지는 않지만, 넌 꼭 해낼 수 있을 꺼야. 널 믿어. 그리고 Van의 경험이 도움 많이 될 거야, 고생 많이 했거든.”


통화를 하고 나니 울적하긴 했지만, 안 한 것보다는 위안이 되고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시간은 밤 9시, Van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나가고 있었다. 이젠 배도 고팠다. 음식점에 들어가 몸도 녹이고 식사도 하고 싶었지만, 그 사이 Van이 나타나 못 보고 그냥 가버리면 어쩌나 하고 계속 참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핸드폰 상점에서 중국인이거나 몽골 사람으로 보이는 한 중년여성이 들어가고 다시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나왔다. 이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키득 떠들면서 Anh 앞으로 걸어왔다. 말을 알아들을 만큼 가까이 왔을 때, 서로 주고받는 말을 들으니 놀랍게도 베트남 언어였다.


“홈 나이 라 트 머이?(오늘 무슨 요일이지?)”

“홈 나이 트 싸우.(오늘 금요일.)”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자신들을 쳐다보는 Anh을 발견하고는 대뜸 베트남인임을 직감하고서 말을 걸어왔다.


“Viet Nam?(베트남 사람?)”

“Vang. Xin chao.(네, 안녕하세요)”

“왜 추운데 혼자 서 있어요?”

“사람 기다려요.”


몇 마디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이들도 돈 벌러 한국에 와서 일하는 노동자들 같았다. 특히 이들은 표정이 밝은 것으로 보아 이미 한국 정착에 무난히 성공하여 소기의 목적을 착실히 달성해 가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부럽기 짝이 없었다. 자신을 ‘Dang Thi Hue’라고 소개한 여성은 언제 한 번 연락하라며 핸드폰 번호를 가르쳐주고는 한쪽 다리를 약간 저는 듯 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가고 나니 지루하고 외로운 기다림은 또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나 금방 올 것만 같던 Van은 무심하게도 찬바람이 불어 손발이 꽁꽁 얼어터지도록 쉽게 나타나주지 않았다.

이제 병이 날것만 같았다. 날은 추운데 배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고 특히 다리가 너무 아팠다. 하는 수 없이 한 손으로 우산을 받쳐 들고 나머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허리를 굽혀 쭈그려 앉아버렸다. 이제 점점 차가워지는 몸이 매서운 추위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음을 느꼈다.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누가 신호를 보내듯 우산을 툭툭 쳤다. 행여 누가 잡으러 오기나 한 것처럼 깜짝 놀라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벌떡 일어서서 뒤를 돌아다보니 흰색의 오리털 파카를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바로 그가 지금까지 애타게 기다리던 Van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채는 순간, 그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Anh?”

“네, 그... 그래요, Van!”


반가움과 원망이 뒤섞이는 야릇한 감정 속에서 온 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버리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뒤로돌아 주저앉듯 다시 쭈그려 앉아 자신의 두 무릎위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25. 희망의 동반자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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