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꿈_15

베투남인들의 한국 이민 개척사

by 이종섭

제3부. 젖은 땅에 뿌리가 자란다.



25. 희망의 동반자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남자는 잠시 동안 전봇대처럼 물끄러미 서 있다가 살며시 Anh의 손을 잡아당겼다. Anh은 젖은 눈을 훔치고는 못이기는 체 일어서며 말을 걸었다.


“집을 나오니까 너무 춥고 힘들었어요.”

“미안해, 야간 일이 많았어. 자, 가지!”


종일 내리던 함박눈은 많이 줄어들었다. 길을 건너 왼쪽 방향으로 몇 분을 걷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서니 편의점 ‘24시간마트’가 나왔다. 그곳에서 뜨거운 물로 컵라면 한 개씩을 불려 먹고 나니 얼었던 몸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많이 기다렸지? Mai한테 말은 들었는데, 각오는 단단히 해야 해.”

“오늘보다 더 힘들까요?”

“그럴 거야 . 한국이란 곳 절대 천국이 아니거든. 어쩌면 지옥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지. 특히 우리 외국인 노동자들에겐 그래.”

“일은 할 수 있어요?”

“우리 베트남하고 한국이 다른 건 바로 그거지. 일은 많아. 하지만 첨단의 하이테크 기술자가 아닌 한 좋은 일자리는 없어, 모두 한국사람 차지니깐... ”

“좋은 건 한국사람 차지?”

“응, 한국은 노조라는 것이 있어. 우리가 아는 그런 노조가 아니야.”

“어떤 노조?”

“대기업은 등록된 노조가 있고, 중소기업은 등록된 노조는 아니라도 한국의 고참 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그런 일을 하지. 우린 이들을 그냥 모두 노조라고 불러. 사장은 우리를 종업원으로 보지만, 노조는 우리를 짐승으로 봐. 사장한테 잘 못 보이면 눈물을 흘리지만, 노조에게 잘못보이면 피를 보아야 해. 물론 모든 중소기업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있던 곳은 그랬어.”

“그렇게 무서운 거야? 그런 거 없는 곳은 없어?”

“있지. 내가 전에 일하던 농장이 그렇고, 지금 일하는 곳도 그래. 한국인은 사장 밖에 없거든. 이런 곳은 월급이 적어. 하지만 가족 같아. 인간대우를 해준다구! 나를 사람으로 본단 말이야, 사람으루!”

Van은 ‘인간대우’라는 말을 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지며 글썽거리는 눈으로 천정을 바라보았다. ‘(주)일진’에서 있었던 배상일과의 생활이 또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기서 노예의 옷을 벗고 처음으로 인간이 된 거지. 월급은 적었지만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비로소 깨달은 거야. 하지만 그런 생활도 오래 가지는 못했어. 현대사회에서 돈 없는 행복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야. 따라서 나는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6개월 동안 한국에서의 성공을 계획했던 거야. 월급쟁이로는 희망이 없다는 거. 그래서 나는 농장주처럼 사업의 꿈을 키웠지. 이런 나의 생각을 눈치 챈 농장주는 지금 있는 공장을 소개해주면서 꼭 성공하여 다시 만나자고 하더군. 농장주 피을동 씨하고 지금의 공장 김남일 사장님은 고등학교 동창이래. 두 분 다 모험으로 성공을 이끈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의 모험이 경제대국 대한민국을 이룩한 거라는군.

너도 앞날의 행복을 찾기 위해 집을 나왔을 꺼야. 따라서 지금까지는 되는 대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성공해야 해. 내 경험으로 볼 때 성공에 대한 희망은 가장 절망적인 때 비로소 찾을 수 있는 것 같아.”

“맞아, 모두 잘 해주기는 했지만 정신적 고통이 너무 컸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서 집을 나온 거야. 하지만 원망할 사람은 없어. 친정집에서 자초한 것이니까. 이제는 친정집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위해 어떠한 모험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어.”

“그래야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알아야 할께 있어.”

“뭐야?”

“한국엔 공짜가 없어. 절대루... 일하다 팔이 잘라져도 돈 없으면 죽는 거야. 우린 외국인 불법체류자니깐, 불법체류자!”

“나도 이젠 불법체류잔데, 빨리 국적신청부터 해야겠네?”

“그래, 불법체류자는 죄 안지어도 죄인이야. 말이나 소보다는 나은지 몰라도 사람보다는 못한 거야. 어쩌면 짐승보다 더 못할 수도 있어. 하여튼 꼭 명심해야 해. 한국엔 공짜가 없다는 것을...”


두 사람은 마트를 나와 걸었다. Van이 택시를 잡으려하자 Anh이 팔을 잡아끌며 말렸다.


“버스 없어? 택시 비싸!”

“없어, 거긴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씩 다녀. 밤 11시면 끝이구... 노선도 하나 밖에 없어.”

“거기 멀어?”

“날이 추우니까 걷기는 조금 멀어, 한 30분 걸려.”

“이제 몸이 녹았어, 그 정도면 그냥 걸어도 돼. 걸어가.”

“그럴까? Anh은 어디서 일하고 싶어?”

“잘 모르겠어, 아직...”

“넌 경험이 없어서 공장에서 일 할 수 있을 런지 몰라. 만약 공장이 힘들면 농장에 가서 일해도 돼. 하지만 전망이 그리 밝지도 않고 너무 지루해.”

“지루해?”

“직원이 한 사람이니까 심심하고 지루하긴 하지. 하지만 난 거기서 처음으로 사람대우를 받았어. 사장님 부부, 너무 좋았지. 그분들도 처음엔 가난했다더군.”

“근데 왜 나왔어?‘

“월급이 너무 적은데다가 사고를 쳐서 하는 수 없이 나왔지. 하지만 난 그분들한테 많은 것을 배웠어. 그분들은 자수성가 하신 분이거든. 첨엔 집도 땅도 없어서 결혼하자마자 두 부부가 남의 땅을 빌려 시작했다는 거야, 하루 15시간씩. 돈이 없어 하우스도 밤낮으로 직접 지었대. 그분 손가락마디가 내 손가락의 두 배나 굵더군.”

“그걸 배운 거야?”


Van은 빙그레 웃었다.


“물론 그것도 배운 거지. 하지만 내가 진짜 배운 것은, 돈이란 모으는 대로 움켜쥐어야지 여기저기 나누면 안 된다는 거였어. 남에게 도움을 주려면 부자가 된 다음에 줘야 해.”

“무슨 뜻이야?”

“어떤 사람들은 가난해도 남을 도우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헤어날 수 없는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일 뿐이야. 가난한 사람들이 번 돈을 나누어 쓰면 영원히 가난을 탈출할 수 없어. 나는 돈을 벌어서 베트남으로 보내지 않아. 절대루... 하긴 나도 첨엔 보냈지만 말이야.”

“그래? 그럼 집은 어떻게 해?”

“미안하긴 하지. 하지만 생각해봐. 베트남에 돈 보내서 도움 됐어? 물론 그런 집도 아주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한국에 온 우리 베트남 사람 대부분은 그냥 그 턱이야. 돈 씀 새만 늘어났어. 이건 낭비고 마약이야, 마약!”

“그건 그런 것 같은데... 그래도 어떻게, 할 수 없잖아. 가난해서 그런 걸.”

“베트남, 심각할 정도로 가난하지, 근데 난 한국 사람이 왜 베트남 사람보다 잘사는지, 즉 돈이 왜 많은지 알았어.”

“왜 그래?”

“옛날에는 한국인도 미국이며 독일에 돈 벌러 갔었다는군. 탄광 광부, 시체 닦는 간호원으로... 우리와 마찬가지였어. 아니 오히려 더 어려웠다지?. 근데 이 사람들은 돈을 부치면 송아지를 사서 키우거나 적금을 들었대. 결코 나누어 쓴 것이 아니었어. 그러니 부자가 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우리 베트남 사람들은 그게 아니야. 생각해 봐, 베트남 사람들 은행통장 몇 집이나 가지고 있어? 없어. 돈 부치면 오토바이 새걸로 교체하고, 집 으리으리하게 고치고,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 차려서 생일잔치하고, 친척과 이웃에 술 사주며 자랑하고 다니는 거야. 우리 집도 1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돈 부쳐드렸더니 빚은 반도 갚지 않았더군. 너무나 놀라웠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 그때 난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 소리를 들은 Anh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사정과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Van이 지금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진심을 이야기 해 주는 것이라 생각하니 믿음이 생겼다. 이 남자가 가르쳐주는 대로 따라 한다면 앞날의 전망도 흐리지 않을 것 같았다. 조금은 용기가 났다.


“물론 베트남 사람 다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난 우리 부모님 절대 못 믿어. 불효한다고 하겠지만, 실패하지 않으려면 어절 수 없어. 그 대신 반드시 한국에서 성공하고 말꺼야. 그런 다음 부모님 모셔와서 구경시켜드리고 함께 베트남으로 가겠어. 난 수십 번 다짐하고 맹서했지.”

“나도 성공해야 해. 도와줘, Van!”

“그래 좋아. 너와 나, 둘 다 성공해야 해. 그리고 우리 모두 성공하기 위해 싸워야만 해. 그러려면 우리도 바뀌어야 해, 우리의 사고. 난 이제 결코 한국 사람들 원망하지 않아.”

“싸워야 한다면서?‘

“싸워야지. 하지만 원망하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이길 수도, 성공할 수도 없어. 그들이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불렀듯이, 우리도 그들이 필요해, 한국인을 이용해야 한다구!”

“난 아직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너무 어려워.”

“그래, 내가 너무 어려운 말만 했나보다. 우리 딴 얘기 할까? Mai 친구사이지? 자주 연락하니?”

“자주는 못했어, 시부모님이 무서워서. 이젠 자주 할 꺼야.”

“우리 언제 함께 모여 식사라도 하자.”

“그래, 너무 좋다! Mai 아기도 보고 싶은데...”


어느새 두 사람은 연인 못지않게 가까워져 다정하게 담소하며 걸어갔다. Anh은 Van에게 바싹 붙어 팔을 잡았다. 이어 Van의 손을 넣은 파카 주머니에 Anh의 손까지 함께 넣어 서로 깍지 끼며 맞잡았다. 따듯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온 몸으로 전해져 왔다. 얼마 전까지 길바닥에서 기다리며 떨던 생각을 하니 남자의 손길이 더욱 따듯하게 느껴졌다.

한적한 길로 들어서니 차량도 뜸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가로등 외에 네온사인도 거의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작은 샛길이 있어 그쪽으로 돌아서니 길의 양 옆은 모두 눈 덮인 시골 밭이었다. 눈이 그친 하늘에는 구름에 싸인 반달이 가끔씩 희미한 빛을 비추며 어디론가 마냥 흘러가고 있었다.

밭이 끝나고 새로운 마을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의 대화도 없이 침묵을 통해 서로의 상상을 주고받으며 걸어갔다.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지어져 있는 공장들 사이사이의 골목으로 들어서니 이름도 없는 허름한 연립주택이 나왔다. 그중 두 번째에 위치한 202동의 2층 201호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방에 불이 켜졌다.

밤이 깊었는데도 불이 꺼진 시간은, 한글로 된 책 읽는 Van의 목소리가 한 참 동안 들리고 난 후였다.



제4부. 베트남 타운


26. 수상한 동네 기산동(機山洞)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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